분명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일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서 마지막 날을 지내는 이도 있을것이고,

그 사실을 모른체 평소와 같이 오늘을 지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나 '하루'는 마지막일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날'

무엇을 해야하며..

누구랑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러기에는 24시간은 너무나 짧다.

아니, 100년도 사실 너무나 짧다.


이렇게도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데

사람들은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한채 고통과 괴로움과 불평과 짜증들로 시간을 채워나간다.

혹 그 중에 선한일을 하고 남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다.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 이렇게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체'가 보여진다.

이제야 '인생'을 조금 알게 되는 것일까?


항상 '죽음'이 코 앞에 있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모습들..



모든이들이 거대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 거대한 목표를 이룬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 소수마저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모습.


그리고 거대한 목표에 이루지 못한이들은

어떻게든 그 거대한 목표에 도달하고자 중요한것을 뒤로한 채 끊임없이 매진하는 모습

그리고 그 길에 동참하지 못한 이들을 '낙오자' 취급하는 사람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렇게 믿으며 행동하는 이들은 거의 볼 수가 없는 세상

이것이 실제임을 깨닫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제대로 가르쳐 주는 올바르고 지혜로운 선생이 부족한 시대


이러한 시대에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내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해야 할 사람들을 깨닫고..

오늘 하루를 놀라운 축복의 선물로 깨닫고 힘있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무엇인가 시대와 세상을 변화시키려 살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것에 감사와 최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인이 아닐까?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에는 '거품'이 생겨 버린다.

그 '거품'을 깨닫는 이들은 적다.


그 '거품'이란..

세상을 변화, 개혁 시키고자 시작했으나

나를 유명하게 하고 싶은 '욕망'으로 변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작이 좋았기에..

변질된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권좌에 앉게 되었을때는 이미 눈이 어두워진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단한 업적보다

위대한 사상보다


'현재의 나'

' 그 주변'

' 주어진 일'

에 대한 감사와 행복으로 하루를 사는것이 진정 지혜있는 자가 아닐까?




희망을 먹고 사는 인생.



"당신에겐 꿈이 있나요?"

"아니, 그 꿈을 이룰수도 없는데 뭐하러 꿈을 가집니까?"


"그래도 꿈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것이 아름다운 인생이에요.."


"그럼 당신은 지금 현실에 만족하시나요?"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인생이란..

어릴적 가장 큰 꿈을 꾸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 꿈이 이룰수 없음을 깨닫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그런데 현실에 적응해서 사니, 인생이 행복하지가 않다.

다시금 꿈을 꾸기에는 너무 철이 없는것 같기도 하고, 내 꿈이 뭔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그냥 다른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사니깐, 나도 그렇게 사는것이 맞는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사는 인생이 되는것일까?

이것이 바로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니깐.

나도 특별하진 않으니깐 그냥 평범한 대중이 되고 싶은것이다.



그런데..

분명 모든 인생은 특별하다.

우리는 무언가에 속아서 평범한 대중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안전한곳이 있을까?

그리고 모두가 똑같아질수가 있을까?


희망이 있다는 것.

꿈이 있다는 것.


그것은 죽을때까지 놓치 말아야 할 인생의 본분이다.

모든이들이 이 땅에서 분명히 각자가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

그리고 모든이들이 이 땅에서 분명 각자의 색깔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은 그래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것 아닐까?


많은이들이 일부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것은 인생의 비극이다.

모든이들이 각자의 특색을 나타낼때, 인생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안그래도 비극적인 인생인데, 그나마 색깔있게 살아야 비극적인 인생가운데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지 않을까?


모든이들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꿈과 희망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이 우리를 오늘도 힘있게 살게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자.

그것은 '인생'을 포기한 자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 18장 36절)



우리는 누구의 왕국을 세우기를 원하는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권력으로

어떤 사람은 사역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고, 그곳에서 자신의 뜻에 복종되거나 이루어지는 일을 두고 기뻐한다.

그것이 인생의 깊숙한곳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이므로, 그런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거나, 본인을 아직 잘 모르고 하는 말일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깊숙한곳에 자리잡은 이 욕망.

그 욕망이 포장되어서 명예나, 사람들이 존경받는 위치나, 가장 위험한것은 종교적인 위치로 자리잡을때 우리는 스스로 속게 된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왕국이 아닌 이것은 신의 왕국이라고 자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던 모든 이들이 한순간에 떠나버린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본인도 깨닫게 된다.

아..내가 100% 그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그분께서 우리를 그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실까?


그런일은 종종 있을 수 있지만 많지는 않은듯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있다면, 사역보다는 자기점검에

사람들이 원하는 일보다는 주님이 원하는 일을 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적게 들린다면..그것이 바로 경고의 소리다.

내 왕국을 세우려고 자신을 속이고 남들을 속이고 결국 스스로 속인 결과에 자신의 헛된 믿음으로 모든것을 포장하게 된다.


그 포장은 자신의 가장 의롭고 선하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충성된 종이라고 믿게 된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인생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라는것을 깨닫을 수 있다.



나의 왕국인가?

주님의 왕국인가?

나는 왕좌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가?

왕좌의 자리 옆에서 그분의 영광과 위대함과 완전함에 매료되길 원하는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척하길 원하는가..

아무것도 없기에 온전하신 그분 옆에서 온전해지기를 원하는가..


작은 차이지만,

이 차이를 깨닫고 삶에 적용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이 모든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땅에 속한것이 아니다.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내려오셨을때, 그분의 왕국은 실제로 우리들에게 보여졌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본 이들이 무척이나 적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 왕국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 왕국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왕국이 이미 제자들에게 와 있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있다.

그 왕국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나만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끼여서 괴로워하는가..










약자 편에 서는 것.

인간은 본능적으로 의도적으로 약자보다는 강자편에 서게 되어 있다. 그것이 부든,권력이든,명예든..

그러나 부와 권력과 명예라는 겉으로 보여진것에 감추어진 인간의 악함을 본 자들은..그리고 그러한 강자의 힘으로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억울함을 제대로 당해본 이들은 더 이상 강자편에 서는 것이 불편해진다. 최소한 양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러하고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인생에서 아픔과 슬픔을 많이 당한다는것은 더욱이 세상에서 소외받고 외로운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얻게 되는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악하고 앞으로도 악할것이며, 강자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 억울한자들, 상처받은자들, 더 이상 꿈과 희망도 사라지는 이들은 계속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는자들에게 위로가 되셨고 없는 자들에게 풍성함을 가져다 주셨다. 그리고 천한자들에게 하늘의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가장 높은 지위를 주셨다.

강자편에 서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고 약자편에서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 이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그들만의 리그!


'믿음'을 가진 이들.

'하나님'을 믿는 이들.

그래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로 살아가는 이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이와 같이 세상에 부르셨고, 하나님 나라에 가기전까지 이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세상에 두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는듯 하다.


나에게는 아직 어린 세자녀가 있다.

첫째는 아들이고 7살이다. 이제 제법 대화도 되고 자기만의 취미생활(?)도 생기는듯하다.

그리고 둘째인 딸이 있다. 딸은 4살이다. 

셋째도 딸인데, 셋째는 16개월 되었다. 이제 막 걷고, 아직은 존재감이 없지만 젤 손이 많이 가는 자녀다.


우리집 거실은 나름 큰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로 거실에서 많이 논다.


어느날, 첫째가 거실에서 기찻길을 만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와 셋째가 만드는걸 방해한다.

첫째는 역시나 짜증을 낸다.


그래서 내가 개입하였다.

방해받지 않으려면 너 방에서 문닫고 기찻길 만들라고 하였다.

거실에서 놀려면 둘째 셋째가 방해하는건 감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명이서 사이좋게 같이 놀던지, 원하는 기찻길을 자기스타일대로 만들고 싶으면 자기 방에서 문닫고 조용히 만들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한 이유는, 거실에서 둘째 셋째가 조금 방해하더라도 같이 즐겁게 놀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조금 포기해야 하는것들이 있다.


첫째는, 방에 들어가서 혼자 놀지 않는다.

물론 동생들이 방해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런데, 방에서 혼자 노는건 더 싫은가 보다.


부모의 마음은 첫째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아니..손해가 아니라 자기 스타일대로 기찻길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동생들과 사이좋게 기찻길을 만들고 놀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물론 둘째, 셋째가 기찻길을 엉망으로 만들것이다.

엉망인 기찻길에서 놀 수 없는가?

놀 수 있다.

혼자 노는것 보단 엉망인 기찻길에서 동생들이랑 같이 노는것이 더욱 재미있는 일이다.

그걸 우리 첫째는 아는듯 하다.


항상 나의 제안대로 하지는 않지만, 자기 방에서 혼자 논적은 없는것 같다.

혼자노는것보다는 동생들이랑 같이 노는게 좋은가보다.


우리 집에서 '거실'은 아빠, 엄마가 주로 활동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놀아야지 아빠, 엄마가 같이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는 공간이다.

첫째가 자기방에 들어가서 놀면 자기 뜻대로 기찻길은 만들고 그 기찻길 만든것을 방해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거기는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고, 동생들도 없다.

아직은 우리 첫째는 그러한 것보다는 아빠, 엄마, 동생들이랑 같이 있는게 훨씬 좋은가 보다.


교회도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서로 교제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사실 많지 않고, 그 범위도 넓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들이다.


하나님에 관한 것들(하나님의 거룩하심,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삼위일체, 전능하심, 전지하심, 하나님의 유일하심(유일신) 등..)

이러한 것들에서 일치한다면,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일치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끼리 교제하지 않고 자꾸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직업관, 종말론, 사소한 교리적인 부분들, 성경해석에 있어서의 다양성(차이들), 교단, 문화적인 차이 등)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들(본질적인것들) 이외에 중요하지 않은(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이해하고 서로서로 받아줘야 한다.

서로서로 받으라는것이 다른 생각과 다른 가치관이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여지를 항상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치관들에 대해서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는 어쩔수 없이 그들만의 리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만의 리그란,

우리 첫째 아이가 드넓은 거실에서 아빠, 엄마, 동생들과 놀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마음에 맞는 이들과만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동일한 이들과는 함께 하지만, 그들과 다르면 이단시 하고 적대시하고 같은 그리스도인끼리 이방인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또한 허락하시는것 같다.

허락하는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것은 그렇게 자기들만의 리그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것이다.

그 역사함만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못을 하더라도, 그 가운데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므로 어지러운 세상가운데 어지러운 조직가운데, 어지러운 교회가운데도 구원받는 이들을 더하는 이들이 역사상 그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방안에서 노느것도 재밌다.

그것도 열매가 있으으로 기쁜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들의 세계관대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거실에 나와서 함께 하나님의 세계를 경영해 나가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기들의 생각과 가치관가 맞지 않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또한 자기들끼리 세계를 만들면 잘 만들 수 있지만, 여러 가치관이 다른 이들과 만들려면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실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러분야의 여러곳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다.


혹,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우리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이제는 자기방에서 나와서 거실에서 더욱 더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것이 어떻겠는가?


그리스도인

고립되면, 부패한다.

나와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해야한다.

물론, 본질적인 중요한 것들은 타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은 너그러이 서로를 받아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최근 명성교회 세습문제로 교회 안팎이 시끄러운것 같다.
오죽했으면 JTBC에서 여러차례 이 내용을 다루었을까?

정말 교회의 세습이 문제인가?
성경적으로 교회의 세습이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얘기해주는 사람을 잘 보지 못한것 같다.

성경은 과연 세습에 대해서 문제라고 얘기할까?
먼저 '세습'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를 좀 살펴봐야 할것 같다.

세습 : 한 집안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

국어사전에는 '세습'에 대한 범위가 한 집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명성교회측에서는 '세습'이라는 용어가 아닌 '계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달라고 주장한다.
그럼 계승은 어떤것인지 살펴보자.

계승
조상 전통이나 문화유산, 업적 따위를 물려받아 이어 나감. [비슷한 말] 수계10().
선임자 를 이어받음. [비슷한 말] 승계2() ㆍ승사4().

계승은 범위가 '가족','조상'도 되지만 가족과 상관없는 관계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명성교회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계승'이라고 표현해도 틀린말은 아닌것 같다.

세습이었든 계승이었든 그 용어가 중요한것 같지는 않다.
분명한건, 성경에서 교회의 목회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목회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어도 된다,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어떠한 구절도 없다.
단지 찾아볼 수 있다면..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교회를 잘 목회할 것을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기타 서신서에도 '바울'이 교회의 인도자들을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목회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다양한 측면에서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봤을때, 목회를 세습,계승 하는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이렇게 엄중하고도 어려운 일을 본인들이 아버지를 뒤이어 한다는데 칭찬하는것이 당연한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들일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고 담임목사가 된 것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장로들이 된것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교회의 리더십들이 가지고 있는것 아닐까?

교회의 주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다스려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것을 잃어버린 교회는
담임목사나 목사,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것이 성경적인 것이지만, 그 다스림은 항상 주님의 복종아래 있는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문제인가?
그렇다면 작은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는 대형교회도 아니며, 작은교회가 잘하는것도 아니다.
어떠한 교회든지, 그 교회의 주인이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가 아닐때 발생한다.

교회가 주님의 뜻에 굴복하고 인도되기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명예를 좇아갈때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모든 교회는 타락할 수 있다.

이미 깊이 타락한 교회는 회개의 기회가 영영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주님은 계속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타락한 교회들이 회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 넘쳐나는 로마카톨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명성교회 세습 반대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한번 타락한 교회가 다시 회복되기는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명성교회는 교단을 탈퇴하고서라도 자기들의 길을 갈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항상 그런식으로 일한다.

내 자신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더 이상 귀울이지 않는다면
그때보다 사탄이 일하기 쉬울때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듣지만, 누구나 넘어져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경계는 내가 믿고 있는 형제들의 권면을 듣지 않을때... 그때는 위험한 때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것만 옳다라고 생각이 들때 그때는 위험하다.
그때는 성경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기존에 자신과 교류했던 경건한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자신의 상태를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명성교회 문제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성장해가고 있는지,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한것 같다.
우리 주위에서 성경적으로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고 주님의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진다.


오...주님께서 마지막 이때에 경건한 자들을 많이 일으켜주시기를 간구한다.


 

때때로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듯 하다.
분명 본인들이 지은 죄를 가지고 본인들이 회개치 않고 사탄에게 그 책임을 돌리기 때문이다.

전혀 사탄은 그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어떠한 영향력도 주지 않았는데 사탄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도록 하는데 최고 1인자다.
그리고 사탄은 그의 추종세력들과 함께 많은 이들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그 일에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런데, 어쩔때는 사탄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도 계획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일들이 있다.
그일을 사탄은 참 좋아한다. 그런데 사탄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기도 하다.
왜냐면 사탄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는데, 죄를 지은이들이 그 원인을 사탄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니 방해하기 위해서 세운 전략이야."
"사탄이 우리 가정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자기와 나를 해방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인듯 하나 정확하게 그 죄의 원인을 사탄으로 결론짓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대화들이다.

야고보서 1장 14~15절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 야고보서에서 얘기하는 한가지는 욕심을 그 원인으로 얘기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 중심에 그가 원하는 자기 욕심이 있으며, 그 욕심에 의하여 사람들이 미혹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욕심을 제어하지 않고 뿌리 치지 않으면 그 욕심이 무엇인가를 생산한다고 한다.

사람이나 동물만이 자녀나 새끼를 낳는것이 아니라 이 '욕심'이라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떠한 분명한 실체도 자녀(?)들을 낳는다고 한다.
그 욕심의 자녀는 다름 아닌 '죄'다.
또한 그 '죄'가 자라서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모두 죄인들이다.
죄인들중의 특성중 하나는 '자기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적당한 욕심이 있어야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욕심'이 과해지거나 그 '욕심'을 이루고자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고 주위의 사람들의 가치보다 본인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더 높아져 있을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욕심'이 원하는데로 내어주면 결국 '욕심'이 잉태하게 되고 '죄'를 낳게 된다.
그 '죄'로 인하여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어두움에 처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어두움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는 그 죄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해야 한다.

사탄이 방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탄이 아니라 내 안의 욕심이 여러 죄악들을 낳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원인을 사탄에게 돌려서 남탓 할게 아니라, 내 마음 중심의 욕심을 파악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외부에 있지 않으며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탄'에게 핑계 대지 말고 내 마음 속의 '욕심'에 대해서 민감히 반응하고
욕심에 이끌려 죄에 이르렀다면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으로 하여금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사탄에게 죄의 화살을 돌려서 스스로 합리화 하지 않고,
회개하여 깨끗한 양심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하지 않을까?

이상한 말로 들릴수 있겠지만,

사탄도 얼마나 억울할까?를 한번 생각해보자!!


 

 

돈만 있으면 한국만큼 살기 좋은 곳은 없다고들 얘기한다.
많은 나라를 가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저곳들을 많이 다녀봤는데 위의 말이 사실일 수도 아닐수도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원하는것을 얻을 수 있는 사회가 한국이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원하는것을 얻을수 있다는것이 살기 좋다는 결론을 낼순 없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밤 12시에도 배가 출출하면 치킨을 시켜먹을수 있고, 집까지 배달을 해준다.
24시간 일하는곳이 주위에 널려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들을 가보면 정말 중심가가 아니고서는 6시 이후에는 대부분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최소한 내가 다녀본 나라의 지역에서는 치킨을 저녁 늦게 배달해주는 곳은 없었다.

그만큼 한국은 낮,밤없이 사회 곳곳에서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좋은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좋은것일까?
그렇게 밤,낮 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

내가 프로그래머로 일할 시절 한국에서는 낮, 밤 없이 일했고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졌다.
그시절 외국출장도 여러번 갔었는데, 프로젝트 기간은 짧았고 그 기간안에 일을 다해야 했었다.
그런데 특이한것은 6시만 되면 같이 일해야될 현지 엔지니어들이 다 퇴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일을 할 수 없기에 어쩔수 없이 나도 퇴근하면서 답답해 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일해서는 2주 안에 끝내야 할 프로젝트를 끝낼 수 없다는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은 참 열심히 일한다.
야근하는것이 당연하고 정시에 퇴근하면 눈치를 주고, 일 못하는 사람으로 찍히고 승진에도 어려움이 있다.
일하지 않더라도 저녁에 야근을 해야지 인정을 받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러다보니깐 일의 양도 야근을 해야지만 할 수 있는 양이 주어진다.
그러니 일자리가 더 부족할 수도 있는것 같다.
모두 8시간 일할 양이 주어진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구지 한사람이 12시간씩 일해야 하니 다른 사람이 일할 양을 뺏어오는것 아닌가?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준 일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동물,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이름 짓는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인가?
그런데 이 세상 모든 만물,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과 하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지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상력, 창조력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그것을 이용해서 정말 아름다운 이름들을 동물들에게 지어주었다.
그 일은 행복했었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최초의 일이었다.
그런데 범죄한 이후에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려야만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하여도 하나님께서 최초에 주셨던 '일'의 즐거움이 상실되는 건 아니었다.
'일'이 주는 기쁨은 유지되지만 거기에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주시는 기본적인 전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이 '일'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이 될때 문제다.
그리고 그 '일'이 지나쳐서 우리의 일상생활(가정, 개인의 삶 등)을 헤쳐버릴때 문제가 발생한다.
'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한 위치로 옮겨질때 문제는 발생한다.

지금의 현대 한국사회는 '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한 위치로 격상된것 같다.
그 밑바탕에는 '권력, 부, 명예'등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사람의 기본적인 양심을 무시하고 일을 처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며
인간성을 상실하고 오직 이윤추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들도 해버리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마음을 지키며 일에 임해야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인것 같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며,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직업에서 기쁨으로 일하는지? 아니면 어쩔수 없이 돈벌기 위한 기계처럼 일하는건지 고민해봐야 한다.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할때 사장의 마인드로 일하는지, 그냥 하루하루 어쩔수 없이 시키니깐 일을 하는건지 고민해야한다.

문제는, 직장에서 만족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지키며 일하는 사람이
가정과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그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가르쳐온것이 한국교회의 주소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의 균형을 항상 가르쳐왔다.
특별히 한국은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많은 우리 부모시대들이 열심히 일해왔었다.
어찌보면 그것은 필수적이었을 수 있으나 지금은 그 상황들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가정들이 무너져있으며, 많은 부분이 '돈'을 위해서 무리하게 '일'하는 분위기 속에 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집값의 문제이며 자녀교육의 문제이며 이 모든것들에 대해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서 고민을 하고 개인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들은 실천해야 할 중요한 시기인것 같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해온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이것을 되돌아 봐야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이 한국사회 속에서 지나치게 일해온 것이 교회 안에도 동일하게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신앙이 훌륭하다고 평가받으며,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반대로 평가받는 분위기가 있다.
이것은 한국사회와 동일한 모습이 교회안에 스며든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경계하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현 시대를 읽을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현 시대를 읽기 위해서는 '역사'를 살펴보고 '교회사'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과거를 통해서 현 시대의 문제점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수 있는지 분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역사를 통해서 분별해야 한다.

교회안에서 열심히 일하여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 가정이 무너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교회 안에서는 인정을 받지만 사회속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주어진 역할을 하며 모든 일들을 기쁨으로 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찾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회속에서 사는것인가?
정말 그런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는듯하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항상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사회속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것이다.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인하여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지만, 그 충성으로 인하여 가정이 무너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또한 가정을 든든하게 세우기 위해서 가정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을 다함이 우리의 사회속에서 교회에서 해야하는 역할들을 무시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역할들이다.
이 역할들이 지금 이시대에는 정말 어려운 일일까?
이러한 역할들을 잘 해내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기 어려운 일은 왜일까?
이러한 역할들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넘친다면,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받지 않을까?
'믿음'은 '삶'이고 그 삶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언제 어디서든 넘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나도 아직 이러한 향기를 넘치지 못하는 것 같고, 이렇게 향기를 넘치는 사람을 잘 못본듯 하다.
나부터 이러한 향기를 넘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분 앞에서 잠잠히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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