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2장 1절~5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에 하나님께서 경고하신것, 그것은 첫 사랑이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바름과 공의로움과 열심, 이 모든 것들의 가치를 예수님은 아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며 첫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어디서부턴가 떨어졌다고 말씀하시고, 처음의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 촛대를 옮기신다고 하신다.
이 얼마나 엄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무엘상 22장 1~2절.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왕권을 이미 사울에게서 다윗에게 옮기셨다.
그런데 그 사실을 사울이 알았는지 그는 분개하였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다.
결국 다윗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었고 도망가는 시점에서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환난당한 모든자, 빚진 모든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
다윗이 쫓기면서 그에게 실제로 필요했던것은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힘센 용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므로 힘센 용사들을 붙여주시지 않으셨다.
다윗에게 붙여준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해서 마음이 아프고 온갖 슬픈일을 당하여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다윗을 지켜줄만한 힘이 없었다.  다만 다윗을 통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 또한 그들의 상황과 어려움들을 함께 듣고 공감하며 자신또한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첫 양떼들은 약하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그에게로 붙여주셨다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다윗은 쫓기고 있었고, 왕도 아니었고 아무런 위치도 없었다.
그러나 쫓기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다윗을 통하여 위로받고 격려받고 하나님을 배워가는 어려운 상황의 양떼들이 있었다.

나의 주변에는 위로가 필요한 양떼들이 많은가? 아니면 나에게 힘과 권력을 줄 수 있는 양떼들이 많은가?


주님의 멍에는 정말 쉽고 가벼운가?

[마12: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를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해서 부르시지 않으셨다.
주님께 가까이 가는 자들은 주님이 그분의 품안에서 쉬게 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은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멍에가 아닌,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일은 어떠한 것일까? 어떠한 종류이며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그 멍에를 메고 주님으로부터 배우라고 하신다.
그렇게 될때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게 된다고 하신다.

모든 것의 시작과 중간 끝 그 모두를 결정짓는 최고 중요한 기관은 마음이다.
이 마음을 지키게 될때, 이 마음이 쉼을 얻게 될때 우리는 어떠한 일들도 해낼 수 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말이다.

우리가 일에 지쳐있을때..그때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나의 마음이 분주하고 걱정과 근심과 쉼이 없을때, 그 원인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원인은 위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예수님의 일,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그 일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셨다.
이 두가지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깊이 고민해보고 따져봐야 할 것은 이것 두가지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예수님의 일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이란 도데체 무엇을 말하는것인가?
그것의 구체성, 그리고 실제성, 그리고 일어날수 있는 삶에서의 모든것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분석해봐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주님께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주님의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고민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답을 구했다면,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그 다음은 쉽다.
그냥 예수님으로 부터 배우면 된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데는 사복음서만큼 좋은곳이 없을 것이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셨고, 어떻게 시간을 분배하셨으며, 그분의 일의 중요성의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그분이 사람들에게 쏟는 시간들에 있어서 특정분류와 그렇지 않은 분류에서 차이가 있었는지..그렇지 않은지 등을 또 살펴보면서 복음서를 살펴본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펴볼때 제일 중요한것은 또한 예수님의 마음일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게 될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평안하셨던것처럼 말이다.
지금 일로 지쳐있는가?
그렇다면 그 일이 주님의 일인지..
그리고 그 일을 주님처럼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일을 잘하고 못하고 보다 중요한것은 그 일이 주님의 일인지 여부와..
주님이 하셨던것처럼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의 부르심, 빌립보서 3장 10절~14절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의 부르심은 어디로부터 오는것인가? 그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 부르심은 일시적인 부르심인가 영원한 부르심인가? 이 땅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계신 곳은 영원하신 곳이다. 그 영원한 곳으로부터 온 부르심은 영원한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부르심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어떤것인가? 직장의 삶으로서의 부르심, 가족관계로서의 부르심, 일꾼(목사,선교사)으로써의 부르심 등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서의 부르심은 이땅에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부르심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르심이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의 부르심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위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 부르심 조차 이 땅의 일로 축소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시어 이 땅에서 필요한 직분과 부르심을 주신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과 부르심은 영적인 일로 보여지는 일일 수도 있고, 영원과 관계성이 높은 부르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땅에서의 부르심이 반드시 영원한 부르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영원한 곳에서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사도바울이 믿었고 추구했던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그가 맡고 있었던 이방인의 사도직이었나?
그가 맡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은 그의 삶 전체에서 너무나 중요하고 가치있는 직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에게는 더 이상 그 직분을 영원한 곳에서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 영원한 곳에서 가지고 있는 사도바울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그는 어떠한 부르심으로 영원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가?

그것은 10절과 12절에서 어느정도 추측해볼 수 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리고 12절에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기 위해서 달려갔다고 했다.

육체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부활의 몸을 입는 소망,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우편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서 경험하셨던 고난,
이 두가지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사도바울의 부르심이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삶처럼 동일한 삶을 살아내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했던 그 고난을 동일하게 사도바울도 자신의 몸에 경험하고자 하는 것,
그러한 경험들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적으로 가져가는 것들이다.

이땅에서 우리의 직분들은 일시적인것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이상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지식,경험들은 영원한 곳까지 계속 가지고 가는 것들이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에 있어서 일에 있어서의 직분,위치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르심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그러한 부르심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우선순위를 따지고, 무엇인가 구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태생과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잊어버린다면 이 땅에서 많은 칭찬과 열매를 가졌을지라도, 영원한 곳에서의 칭찬과 열매는 이 땅에 비례해서 부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모든 믿는자들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과의 연합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아내(남편)와의 온전한 연합을 할 수 없다.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절.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에게는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어줄 수 있는 지혜가 있었고, 그리고 이땅을 살아갈 만한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일이 그에게 있었다.
그런데, 그 일거리 뒤에 아담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돕는 베필이라는 것이었다.
'돕는 베필'이 아담에게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베필'을 아담에게 줄 계획을 하신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은 '여자'를 새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만드셨다.
'여자'의 중심은 남자의 갈빗대에 있었다. 그리고 살은 하나님께서 채우셨다. 그리고 그 하와를 하나님이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신다.
그걸 본 아담은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뼈로 여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신의 살로 만들어진것은 아닌데, 자신의 살이라고 고백한다.

그 사람의 존재성 자체는 그 중심에 있는것이다. 살은 하나님께서 붙이셨지만, 그 중심의 뼈는 아담에게서 취해진 것이므로 살 또한 아담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것이다.
우리의 중심과 기초, 뼈, 근본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우리 전체의 소속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고백은 옳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4절에는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고 하였다. 아담에게 부모가 있었는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떠난다는 말인가?

 하나님을 떠난다는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기록은 단순히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아담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인가?
아니라면, 이것은 완전히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 부모에게서 받았던 그 관계를 이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넘어가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는것일까?
하나님과의 연합관계에서 배운 걸, 이제는 자신의 아내와의 연합에 적용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일까?

 결국, 하나님과 아담은 하나였고, 그 깊은 관계를 배웠다. 그리고 나서는 그 깊은관계를 여자인 하와에게 적용하라고 한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이 더욱 쉽게 다가오는 것 같다.
둘이 하나될 수 있는 이유와 근거 그리고 적용법은 하나님과 하나되었던 그 관계에서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된 연합의 관계를 배우지 못한 이가, 어찌 아내와 연합의 관계를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연합 뒤에는 그 두사람의 벌거벗음, 그 어떠한 허물도 둘 사이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연합속에 숨겨진 끈끈하고 깊고 절대 끊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이 그 관계를 튼튼하게 지속하는 것이다.





6절.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7절.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8절.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주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참으로 비통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과 함께 하실때 사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고 영광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언을 하였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사울이 아니며 새 사람인 사울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러움을 나타내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는 이러한 영광 가운데 기회를 따라 행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저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아 알게 된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삶 속에 들어와 역사하였으며 그 역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제 삶 가운데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 기회는 나의 어떠한 의지와 행함에 따라서 결정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의 책임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계획을 이루십니다. 사울은 이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함께 하셨지만,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을 좇아 갔으며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왕위는 다윗에게로 옮겨졌으며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영광은 다윗에게 옮겨졌으며 다윗의 씨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잃어버렸던 것은 단순한 왕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잃어버렸던 것은 그를 통해서 오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의 길을 예비하는 그 엄청난 영광스러운 통로의 길을 그 자신 스스로 버렸고 그 길에서 이탈되었던 것이었씁니다. 우리의 삶이 정비되지 않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졌을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직위를 상실해 버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실상 그 직위와 직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는 통로가 되는 영광스러운 그 직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목사나 선교사의 직분을 가진 것이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것은 표면상으로 보여지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선교사의 직위를 박탈된다면 사람들의 시선과 이목때문에 우리는 힘들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직분을 잃어버려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비난을 받는 고통, 그것은 일시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원한 세계에서 우리가 받을 상급과 우리를 통해서 보게 될 얻게 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 가장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보여지는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곳에서 보여지지 않는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까?보이는 영광을 쫓는 자들은 보이는 것에만 집착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비록 보이는 영광을 얻었을지라도, 그것으로 만족했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영광을 얻지 못할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영광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영원한 삶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영원히 만족하지 못할 것에 우리의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과 영적인 성숙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때, 열매는 진정 보장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정말 우리의 열심이 열매와 연관이 있는가?
아니라면, 우리의 열심과 열매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것인가?

이 질문에 한가지 답변만 한다면 그것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성경에는 분명 다양한 측면이 있다. 오늘은 그중에서 특별히 '요나'를 통해서 우리의 노력과 아무런 상관없는 하나님의 열매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에는 많은 선지자가 나온다. 그중에 아마도 가장 열심 없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요나가 아닐까?
요나는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말씀을 받았지만, 그 뜻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끝내 마지못해 니느웨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정말 대충대충(?) 전했다.
그 마음의 열정도 없었으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다. 심판을 당하는것이 마땅하다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전했다면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일까?

어쨋든, 그 요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정도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전하기는 했다.
근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선지자의 말에 반응하여 니느웨의 온 백성이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다.

얼마나 놀라운가?
아무런 열심도 열정도 없는 그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니느웨 온 백성을 회개시킨 것이다.
인류 역사상 온 민족이 이런식으로 회개한 역사가 있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근데 이렇게 놀라운 부흥의 역사 뒤에 사용된 선지자를 살펴보자. 얼마나 형편없어 보이는가?
그에게는 니느웨를 향한 어떠한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반대의 마음을 가져보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요나를 사용하셔서 인류역사상 가장 놀라운 회심(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

결국, 니느웨의 회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열매들을 낳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열심 있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부흥케 하시는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의 열매의 근거를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또는 그러한 비슷한 종류의 것들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이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는것이다. 우리의 어떠함은 우리의 열매에 근거될 수 없다

열매와 우리의 어떠함은 상관이 있을 수도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영역인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일'을 부여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부여하신 임무였다. 그 '일'이 어떤 것인지 하나씩 살펴보자.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으셨는가를 봐야 한다.
 -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과 닮은 모양으로 우리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피조물은 하나님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아주 닮은 형태를 창조하시고 싶으신것 같다. 그래서 가장 비슷한 모양과 형태로 우리를 만드셨다. 그것은 외모의 어떠함에 국한되기 보다는 지,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영혼을 가지고 각종 감정을 느끼며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일을 하며 또한 하나님이 가지신 여러 속성들을 함께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것의 비슷한 모양으로 우리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봐도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진 모든 속성을 우리도 그와 비슷한 형태로 부여받았다. 우리는 신은 아니지만 신과 비슷한 존재로 지음받은 놀라운 피조물인 것이다.

2) 지음받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은 '일'을 부여하셨다. 그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ㄱ)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가축, 온 땅,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는 것
   첫째는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물고기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다스림속에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어떤형태로 가능했을까? 범죄 이전에는 지금의 몸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수영을 하더라도 좀 더 오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물속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물고기보다 수영을 더 잘해야하지 않을까?
  
 둘째는 하늘의 새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하늘의 새를 다스리기 위해서 하늘을 날 필요가 있었을까? 범죄 이전에는 사람도 하늘을 날 수 있었을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하늘로 부활하실때 올라가셨던 것 처럼, 그와 비슷한 몸의 능력을 혹시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뭐, 그렇지 않더라도 새들을 다스리는데는 큰 문제는 없다. 새들을 불러서 사람 근처로 오게 하면 되니깐..
 
 셋째는 가축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염소, 양, 소, 돼지, 닭 등 각종 가축들을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많은 인류가 계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타락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타락이전에는 가축을 다스리는 것뿐이었지만, 지금은 가축들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식량으로 그리고 농사를 돕는 도구로 그리고 성경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제사제물로써 가축들이 드려지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다스림의 존재로써 가축들이 있었다면 타락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가축들을 볼때 하나님의 타락을 기점으로 한 역사에 대해서 경외감을 가질 수 있다.
 
 넷째는 온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원어에도 '땅'은 특별한것은 아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이 지구상의 '땅'을 의미하는 것 같다. 범죄 이전에는 농사를 짓지 않아서 땅이 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다. '땅'을 다스리는 것, 인간이 어떠한 의미로 이것을 해석하고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범죄 이전에는 아무 '지진'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진'을 사람이 다스릴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땅'을 다스리는 건 어떠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일까? 아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그러한 의미에서 기초적인 이 땅을 잘 다스리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지구'를 인간이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또한 아닐까? 나아가서는 이 땅에 '죄'가 드러오지 않도록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신 명령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여기서는 근거있는 해석보다는 여러가지 추측에 불가한 상상속의 해석으로 그치는 것이 안전할 듯 하다.
 
 다섯째는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고 했다. 기는것들에는 지렁이같은 땅속의 벌레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이 있다. 사실 별로 다스리고 싶지 않은, 별로 볼품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다스리라고 인간에게 명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들이 어찌 사소한 것이 있겠는가? 사람의 눈에는 비록 별볼일 없어보이고 다스릴 필요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모든 피조물이 사람의 다스림이 필요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작은 것까지 다스리도록 명함을 받은 인간의 일은 얼마나 많았던 것인가?

 이와같이 다양하게 주어지고 상당히 많은 양의 일을 과업으로 맡은 인간이 이 일을 어떻게 즐겁고 기쁘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범죄 이전에 슬픔이란 없었을 것인데, 어떤 마음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 일들을 즐겁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분명한 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은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일할 수 있다는 것 만큼 행복한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다양한 일들을 주었음을 상기해보면서 우리가 맡은 일들의 소중함과 이 일들을 맡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조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 하나님이 두가지 명령을 주셨다.
  첫째는 열매를 맺는 삶이었다. 다른 말로는 결실이 풍성한 삶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 주신 땅에서 충만하게 될 것을 명하셨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열매 없는 삶에 대해서 되돌아봐야 할 필요를 보게 된다. 열매 맺는 삶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태초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 열매 맺는 삶의 결과로 이 땅에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넘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대하셨다.

  둘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물고기, 새, 동물,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것들(식물들 포함)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하시지 않으셨지만 분명한건 하나님이 만든 많은 피조물을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 다스림 안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계획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신 지성들을 사용하고 감성들을 사용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이러한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서 계속 놀라움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들이 넘쳤을 것이다. 결국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워가길 원하셨을 것이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우리의 삶에 열매 맺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명하신 각자의 위치와 명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주신 은사와 지혜와 각종 능력들로 하나님 주신 일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함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예배로 드려지게 될 것이다.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1)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채소, 모든 열매들을 사람들에게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느끼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 사람에게 큰 노동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음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수고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사람은 분명히 일을 통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먹을것을 먹인다. 그러나 성경을 볼때 일의 목적이 먹고살기 위한 것은 아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일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길 원해서 였던 것 같다. 일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댓가로 우리에게 재물이 주어지고 또한 그 재물로 우리가 먹고 살기도 한다. 그러나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채워주시는 영역으로 보여진다. 물론 그 먹는것의 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 차이 또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아니고 사람의 범죄함으로 인한 결과이지 않은가?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더욱 사랑하시는 사람을 먹이지 않을리 없다. 물론 게으른 자들은 스스로 굶기도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 하나님은 인생에게는 맛있는 채소와 열매들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다른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들에게 풀을 또한 먹이로 주셨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냥 굶어 죽도록, 그리고 스스로 알아서 자기 먹을 것을 먹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먹을 필요가 있도록 지으셨고, 그 먹을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먹을 것을 주신다. 그런데 '일'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직업(일)의 개념과는 조금 상이한 듯 하다. 

 오늘날로 해석하자면, 교회의 일꾼과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도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먹을것', '의식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치관이 있다면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나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재물을 얻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을 통해서 '재물'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장에서의 월급의 가치로 우리의 직업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월급'을 받는 일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과도 그 '일'에 있어서 차별이나 어떠한 상이한 개념을 갖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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