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에 기록된 2장 10절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함께 갈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스런 목소리가 느껴지고, 나를 너무나 이뻐하는 주님의 마음이 전달된다.
그리고 저러한 음성을 직접 듣고 그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아가서와 같은 말씀이 직접 들려진다면 어떠한것 고려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길을 갈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정상적인 제자들의 반응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신약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셨다.
마가복음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가서 말씀과 마가복음 말씀은 같은 말씀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분명 예수님은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뒤에 자기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부연설명까지 해주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것 같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니깐 그냥 기쁨에 아니면 순종하는 마음에,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의 당연한 도리로 따라갔을까?

제자들이 분명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을때, 따라 왔다.
그러나 그 뒤의 말씀이 우리를 되돌아 보게 한다.

마가복음 15: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셨다.
제자들이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나서 함께 가려고 하였지만,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가자는 음성을 듣기를 좋아하는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을 두려워하는것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길로 주님이 우리를 이끄실때는 기뻐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다른 길들로 인도받을때 그 길에서 도망치지는 않는가?

십자가의 길, 분명 좁은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운데에서도 적은 이들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지금도 여전히 소수지만 이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할때 함께 갈 수 있는가?
제자들도 모두 함께 가는 행동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모두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는지 묵상해볼 필요가 있고,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그 음성에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응답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길이 험하고 남들의 비방을 받고 버림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 마지막에 영광스런 주님께서 우리를 맞아 주실것이다.
세례요한의 마지막이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는 목베이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버려도 된다는 당위성을 제공하진 않는다.
먼저 제자들이 한 행동을 교훈삼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드럽고 사랑스런 음성에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상 1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브닌나는 자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남편으로의 사랑은 한나에 비하여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1순위로 받았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보다는 브닌나가 가지고 있었던 자식들이 크게 보였던것 같다. 
아내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것은 자식도 그 무엇도 아닌 남편의 사랑이다. 그것만 있으면 아내는 모든걸 기쁨으로 해낼 수 있다.
그런데 한나는 왜 그것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것에 그녀의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것일까?

이것은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온전히 만족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다른 모든것은 넉넉히 이길수 있고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다.
실상은 우리도 한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래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는건 그 하나님보다 다른것을 더 귀하게 여겨서 그런것 아닐까?
다른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지금 나에게 없어서 마음이 괴롭고 슬픈건 아닐까?
나의 남편되시고 0순위 되시는 주님이 이렇게 나에게 물으시는 것 같다.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너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하나님) 너에게 다른 어떤것보다 낫지 아니하냐?





우리는 언젠가부터 영적인 일과 세상적인 일을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와 교회에서의 모습이 사뭇 다른것들을 볼 수 있다.
직장에서의 동료들의 평가와 교회에서의 평가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직장과, 교회와 가정에서의 평가가 모두 다르다.

그럼 어디에서 누가 하는 평가가 가장 정확한 것일까?
모든 평가가 잘못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의 평가는 많이 다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의 평가보다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평가다.
우리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믿음의 길에서 파선될 수 있다.

우리는 직위와 직분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와 교회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목사, 선교사 등을 더 영적인 사람으로 이해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목사와 선교사등의 full time 사역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그들이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많은 고충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포지션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그리스도인보다 더 영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반대한다.
아니 그러해서도 안된다. 그 사람이 가진 포지션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을 우리 스스로 평가하거나 판단 할 수 있는 자격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우리의 생각속에 있는 것들을 점검 해 보기는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들을 더 영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메세지가 훌륭하면 그를 더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메세지의 훌륭함과 그의 영성과는 관계가 있을수도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왜냐면 메세지의 훌륭함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그 은사를 받아서 노력한 결과로 더 먹기에 좋은 음식이 될 순 있겠지만, 그러한 노력은 주신 선물로 인한것이지 그가 더 영적으로 성숙해서 그런 것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전한 메세지 그리고 그의 삶이 일치된다면 그는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그를 성도들은 존중하고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한 메세지와 그의 삶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의 메세지는 존중받되, 그는 존중받아야 하는 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메세지가 성경적인 메세지인지 검증되어야 하는 것은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다.
모든 메세지를 아무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에 왜 계속적으로 거짓선지자들을 경계하는 말씀들이 있겠는가?

'제자'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269번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세 번 나오는데, 정확히 얘기하면 예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처음에 등장했다.
사실상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제자가 되는것을 동일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제자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받음과 동시에 제자가 되었다고 얘기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일꾼이고 사역자이다.
구원 받음과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사역자들이 된 것이다.
사역의 역할과 시간을 배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상이하다.
그가 가진 은사와 재능과 배경과 삶의 형태와 지역과 시대와 여러가지것들이 고려되어서 그가 하는일이 정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것의 고려 없이 full time 사역자들을 더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더 영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고전12장 8절에는 어떤이에게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 예언함, 영들 분별함 등을 주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28절 이하에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것, 다스리는것 각종 방언 말하는것 등의 은사를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에서는 모든이들이 선지자와 교사 등을 더 가치있는 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교회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 역할을 반드시 해야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인생의 full time을 말씀 연구와 실행, 가르침에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몇 안된다. 그건 가지고 싶어서 가질 수 있는것도 아니고 주님편에서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러한 역할을 모든 이들이 동경하고 그일이 더욱 가치있는 일인것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교회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은사대로 섬겨져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어진 은사에는 더 귀한것도 덜 귀한것도 없으며 모두가 동일하고 똑같이 가치 있는 일이다.

같은 의미로
교회안에서의 일과 교회 밖에서의 일의 중요성은 동일하다.
어떤것이 더 가치있고 어떤 것은 덜 가치있는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대로 그 사람이 그 일을 기쁨으로 할때 그 일이 곧 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일의 범위와 경계 그 일의 태도에 있어서 정직, 공의, 성실, 양심에 청결함 등이 그것을 영적인 일로 가능케 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순간 그 경계를 단순히 교회 밖의 일과 교회 안의 일로 결론을 지어 버렸다.
그것은 성경과는 멀어진 것이다.
심하게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의 속을 그 누가 알랴?

성경은 집안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과, 설겆이 하는일, 그리고 거리에서 지나가다가 휴지를 줍는일, 그리고 누군가를 도와주는일, 그리고 교회안에서의 여러가지 영적인 봉사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섬김들 그 모든 것들을 동일한 가치로 두고 평가 하는 것 같다.
그 일의 성격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일을 함에 있어서의 그의 내면의 상태, 동기, 하나님과 함께 행함의 여부 등이 성경이 지지하는 바이다.

내가 직장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일을 하고,
집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아내를 돌보며, 남편을 섬기고, 집안 일을 하고,
그리고 교회에서 주어진 은사대로 그 역할들을 해낸다면
그 어느것 하나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귀하고 모든것이 가치 있고 모든것이 영적인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과 동기가 어떠한것인가와,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주님과의 동햄함이 우리의 일의 가치를 평가 하게 될 것이다.

나는 혹 어떤 일은 귀히여기고 어떤일은 반대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혹 어떤 사람은 더 귀히 여기고 어떤 사람은 덜 귀히 여기지 않는가?
나는 혹 직장과 교회와 가정에서 다른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혹 내 은사가 아닌데, 남의 은사를 탐내지는 않은가?

나는 혹 내 위치가 아닌데 그 위치에서 주는 명예와 인기를 탐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 강요(하) 제 9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중 12. 맹종은 불가하다 

 현대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할 만한 도움을 이성에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최후의 가련한 도피 수단을 사용한다. 즉 이 사람들 자신은, 비록 그 마음과 생각이 둔하고 심정과 의지가 철저하게 악할지라도 인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히 13:17) 주의 말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사실 이런 자들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내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여호수아보다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주의 선지자요 훌륭한 목자였던 여호수아를 주께서 그 직책에 임명하실 때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들어 보자. "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8,7). 그러므로 주의 율법에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자들의 교훈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경계하라고 주께서 자주 경고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한 요한의 충고도 헛것이 될 것이다(요일 4:1). 천사들도 이 비판을 면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탄과 그 거짓말은 오죽할까(갈1:8)?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신 말씀은(마15:14)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어떤 목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가 하는 것과, 무분별하게 모든 목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칭호에 놀라며 우리까지도 끌려가서 그들과 같은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름으로 가장했든간에 다른사람들의 잘못에 끌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특히 경고하신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이 해답이 옳다면, 대제사장이든 대주교든 교황이든 그 누구이든간에 눈 먼 인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과 함께 같은 벼랑에서 떨어지게 할 뿐이다. 따라서 이름이 회의나 목자나 주교라고 해서(그 가운데는 진정한 이름과 가짜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과 행동을 증거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의 영을 검토하며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기독교 강요 하, 30page 16. 완전을 자칭함은 그릇된 의견의 결과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착한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지만, 이런 신경 과민은 진정한 거룩과 거룩에 대한 진정한 열성에서 생기기보다는 자만심과 교만 그리고 거룩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서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대담하게 교회 탈퇴를 선동하며 기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모든 사람을 경멸하며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 외의 별다른 이유가 없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고 적절하게 말했다. "교회의 규율을 경건하게 유지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에(엡 4:3)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 상호 관용의 교훈을 지키라고 사도는 명령했다. 지키지 않는다면 그 시정책으로 처벌을 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며 따라서 시정책이 아니다. 이 악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미워한다기보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거나 적어도 분열시키려고 한다. 자만심에 부풀고 미친듯이 완고하며 거짓말로 중상하고 음모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 악한 무리는 강직, 엄격한 체해서 그들에게 진리의 광명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게 한다.

성경은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되, 더욱 온유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며 성실한 사랑과 평화로운 단결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이 원칙을 모독적인 분파 행위로 더럽히며, 형제들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삼는다. " 그러나 어거스틴은 경건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하게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끈기 있게 참으며 사랑으로 애통하라. 하나님께서 시정하시거나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며 쭉정이를 키질하실 때까지 기다리라" (마 13:40, 3:12, 눅 3:17)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이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차고 용감하게 의를 옹호하는 듯하면서도 유일한 의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이 눈에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악인들이 밉다고 해서 이 공동체의 표지를 깨뜨리는 사람은 성도의 교통에서 탈락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큰 무리 가운데 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거룩하며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 그들은 병든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과오를 결코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주를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삼 분발하며 더 고결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지극히 성결한 사람도 심히 유감스러운 과오를 범하는 때가 있으므로 사람을 한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며 신성한 신비에 참가하는 것은 이 모든 권능이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허비될 가능성보다 교회의 집회를 위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끝으로,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님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 마음속에 우리를 먼저 품으셨던 우리 주님을 이시간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와 교제하고자 하셨던 주님.
주님께서는 그때도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교제 이상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아들, 딸들로 삼고자 하셨던 주님
모든 것의 근원이셨고 모든것이셨던 우리 주님이 그 모든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상속해서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영광스러운 아버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는 주제 앞에서 엎드려 경배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 이해하기 어려운 예정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지혜앞에서 엎드립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신의 아들, 딸이라는 지위로 높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드립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몸소 체험하여야 했을 저희들인데,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저희들 안에 심으시고 하나님의 한없이 크신 은혜를 영원토록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찬양케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모든 것들이 거저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에 다시한번 주님의 크심을 높여드립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선한 양심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1:5)

믿음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1:19)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다.
바울은 주님의 종이었고, 나이가 어린 디모데에게 주님의 일꾼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사랑을 담아서 편지를 썼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꾼들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성경은 일꾼의 자질중에 이 선한양심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것 같다.
그래서 딤전 1:19절에는 이 양심을 버린이들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고 까지 한다.

양심을 버린것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
정말인가?
성경은 그렇다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양심에 민감한가?
성령께서 우리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히 들리는가?

처음 무엇인가 잘못된 일을 했을때 우리의 양심이 제일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그때 어떠한 이유로 그 양심의 반응을 덮어 버리게 된다. 그러한 일을 반복하게 되면 그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양심이 무뎌지고 양심의 반응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때로는 대의라는 명분 아래 우리의 양심을 속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계속 반복하게 되면 결국에 우리의 양심을 버리는 일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청결한가?
나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착한 양심을 소유한 주님의 일꾼인가?

서머나 교회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 겉으로 보여지기에 서머나 교회는 환난가운데 있었고 궁핍함 가운데 있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도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으며 다른 이들도 그렇게 봤을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를 부요하게 보신다. 하나님은 항상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은 무엇인가? 실제 그들은 서머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었다. 
- 겉보기에 유대인이었고, 겉보기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었고, 유전적으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 문제는 그들 스스로는 너무나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까지 단언하신다.
- 스스로 나를 보는 관점은 언제나 실제와 다를 가능성이 넘쳐난다. 중요한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의 평가도 아닌 하나님의 평가다.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실제로 순교에 이르렀다.
 - 성경은 십일 동안 환난을 받는다고 기록되어있다.
 - 우리에게 닥친 환난은 그렇게 길지 않다. 그 기간을 충성할때 하나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선물로 주신다.
 - 때로는 고난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두려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친히 나에게 주실 선물은 나로 하여금 짧은 고난의 시간을 넘어서게 한다.
 -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 그 고난은 너무나 길어 보인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 기간은 짧았고, 그 기간은 하나님을 더욱 알게되는 시간이고, 더욱 하나님과 친밀해 질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곳곳에 서마나 교회와 같은 실상이 부요한 교회들을 많이 두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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