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장 24절,25절)

 

 

누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회심한 자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다.

 

특별히 열심있는 사람이 제자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다.

그런데, 제자들이라고 모두 예수님을 따라가는건 아니다.

 

이미 자신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 한다.

자신을 따라오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것을 말씀하신다.

 

이뜻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앞구절에 어떤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한다.

이 앞구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사명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얘기하니 베드로가 적극 반대하면서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오랜시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 들었을것인데,

들었지만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것은 다른데에 있었는듯 하다.

그들이 예수님을 좇아 갔던 이유가 예수님이 추구하는 목표와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야기 하신다.

 

첫째, 자기를 부인할 것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질것.

 

사람이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이 2가지 큰 명제를 주셨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자기 십자가를 지라니..

 

자기 부인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것을 내려놓는것인데,

이는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자존심마져 버려야 하는것이다.

인간이길 포기하는것. 자신이길 포기하는것. 이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중에 하나이다.

 

또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것인데,

십자가의 특징은 자기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것이다.

사람이 언제 힘든가?

외로울때, 누군가가 공감해주지 않을때, 자기 혼자 그 일을 해결해야할 때

 

이러한 상황이 사람을 가장 어렵게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 2가지가 예수님의 제자로써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자의 기본 자세이다.

이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거나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간다고 입술로만 고백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실제적으로 어려운것 처럼 보이고, 어렵기는 하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또 다른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그 뒤에 희망과 꿈이 있을때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그것은,

목숨을 얻고자 하면, 목숨을 잃게 되고

목숨을 잃고자 하면, 목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법칙에 어긋나는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은 작은 의미의 세상이고, 더 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 법칙에서 예수님은 설명하고 있는것이다.

 

우리가 잡으려고 하면 잡을 수 없지만,

잡는걸 포기하고 손을 펴며, 또 다른 새로운 것이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움켜쥐고 잃어버리기 싫어하지만,

움켜진다고 계속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내려놓으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주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세상의 법칙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야 할건,

당장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우리의 관심사들이 아니라,

그 관심사 너머에서 일하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그렇다면 위의 말씀을 믿어야 할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좇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결국,

모든 건

'믿음'의 문제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The Sacrifice of Isaac, 1635, oil,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을것을 약속받은 후 25년을 기다림.

1.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때 75세(창12:4)

2. 아브람이 이삭을 갖게 될것을 약속받음 75~76세사이.(창15:1~5)

3.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음. 86세 (약속 받은 후 10년정도 지난시기) (창16:16)

4. 아브람이 이삭을 낳음, 100세(약속 받은 후 25년정도 지난 시기)(창21:5)

 

이삭은 결혼 후 20년 후 야곱을 낳음.

1.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창 25:20)

2. 리브가도 임신을 하지 못하였으나 기도 후 임신하게 됨(창 25:21)

2.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낳을때는 60세(창25:2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이삭을 통해서 온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 그리고 야곱 그리고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는 약속이었다.

 

단순히 아브라함에게만 한 약속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가족, 후손을 통해서 이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이 약속을 알려줬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8~19절)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녀를 통해서 구원자가 오게 되고, 그 구원자를 통해서 온 인류가 복을 받게 된다는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 복음의 통로의 역할을 하는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지만(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그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것 같은 느낌,실제를 둘 모두 경험하게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는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최근에는 여러가지 환경오염과 인스턴트, 각종 스트레스 등으로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시절에는 그러한 것이 많지 않은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에는 자녀를 많이 낳는것이 곧 힘이었다. 그러므로 아내가 자녀를 갖지 못한다는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여부를 떠나서 사회적으로도 비난을 받는 일이 되는것이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자들의 슬픔을 볼 수 있다.

 

결국 사라와 리브가도 이러한 비난을 받으면서 지냈을 것이고, 이러한 어려움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도 그대로 전가가 되는것이었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여부를 떠나서 일상생활도 힘이 드는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모를리가 있을까? 절대 그럴순 없다. 그러한 상황을 모두 아심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이라는 세월을, 이삭에게는 2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다.

 

둘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기다려야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기다림, 인내를 잘 하지 못한다. 가장 힘들어하는 영역일 수 있다.

눈에 보이는걸 좋아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힘들어 한다.

오랜 시간 기다림이 힘든것도..기다리다 보면 약속도 잊어버리고 믿음이 점차 사라진다.

그러한 것을 인간은 견뎌내질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다림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배우게 하신다.

 

아담에게 주신 약속, 그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그리고 계속 이어져 다윗에게..그리고 오랫 역사를 지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일까?

그리고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후 승천하시고 다시 이땅에 오신다고 하신지 2000년이 더 되는 시간이 지났다.

언제 오실까?

아직 1000년은 더 있어야 하는것일까?

하나님은 더 많은 인류를 보기를 원하시는것 같기도 하다.

곧 오셨으면 좋겠지만, 금방 오실것 같지는 않다.

더 많은 하나님의 자녀를 보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듯 하기 때문이다.

 

기다림.

아브라함은 25년, 이삭은 20년 기다렸지만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4000년 이상을 기다리고 계신다.

앞으로 더 기다리실것이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이런 생각이 드니, 나의 기다림은 기다림도 아닌것 같다.

하나님의 오래참음과 기다림. 그것이 결국 사랑이고

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람들은 배우기를 원하시는것 같다.

 

배워도 겨우 25년밖에 안된다.

4000년 이상을 기다리는 하나님에 비해서

우리 인생의 기다림은 너무 짧은것 아닌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Great Commision, 그리스도의 대명령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이다.

사명 VS 사람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것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사명'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무엇인가?

각자마다 은사가 다르고 부르심이 다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다.


1.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2. 세례(침례)를 주고, 

3.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를 가르쳐 지키게 하는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첫번째 사명은 제자를 삼는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닮도록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양육하고 본을 보여서 가르치는것이다.


우리는 사명이라고 하면 여러가지것들을 떠올린다.

여러가지 교회의 사역이 있고 헌신(헌금,시간을 드림, 재능,은사를 드림)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과 헌신은 '사명'이라는 큰 목표 아래에서 실행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중요하고 계속해서 이땅에 살면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때로는 사역과 사명이라는 명분하에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된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일', '사역'은 어떤 면에서 기쁨이고 성취감을 주게 된다.

영적인 일이든 그렇지 않은일이든 성취감은 우리로 하여금 일을 계속하게 되는 동기를 준다.

이러한 동기는 좋은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가 지나치게 되면 본질적인 사명인 사람을 낳는일에서 멀어지게 된다.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일에서 시작하였다가, 그 본질에서 벗어나 활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활동에는 대부분 큰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활동에는 물질과 숫자와 눈에 보이는것들, 사람들의 명성, 칭찬이 뒤따르는 일들이 많다.

분명 영적인 활동들이 분명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러한 활동들 뒤에 일부의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벌어진다.

분명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셨다.

그들 스스로 떠난적은 있지만 예수님께서 강제적으로 권위적으로 부족함으로 그들을 떠나 보내게 한적은 없다.

예수님은 끝내 자신을 배반할것을 아셨던 가룟유다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사명을 명분으로 삼아 사람을 쉽게 버린다.

내 말을 잘 듣는이들을 제자로 삼고, 그렇지 않은이들은 버리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정치. 이것과 다를바가 없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혹, 내가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내 주변의 사람들이 상처받고 자꾸만 떠난다면....

다시금 나를 되돌아봐야 할것이다.

많은 사역의 열매와 눈에 보이는 숫자들보다도 중요한것이 있다.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한 영혼의 가치이다.

혹.. 내 주위에 사람들이 자꾸 떨어져 나간다면, 지금부터라도 한 영혼을 주님처럼 가치있게 여기는 일을 훈련해야 할것이다.


한명의 제대로 된 제자를 삼는것이,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 목회를 하는것보다 주님 앞에 큰 칭찬이 있을 수도 있다.


아가서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에 기록된 2장 10절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함께 갈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스런 목소리가 느껴지고, 나를 너무나 이뻐하는 주님의 마음이 전달된다.
그리고 저러한 음성을 직접 듣고 그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아가서와 같은 말씀이 직접 들려진다면 어떠한것 고려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길을 갈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정상적인 제자들의 반응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신약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셨다.
마가복음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가서 말씀과 마가복음 말씀은 같은 말씀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분명 예수님은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뒤에 자기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부연설명까지 해주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것 같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니깐 그냥 기쁨에 아니면 순종하는 마음에,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의 당연한 도리로 따라갔을까?

제자들이 분명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을때, 따라 왔다.
그러나 그 뒤의 말씀이 우리를 되돌아 보게 한다.

마가복음 15: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셨다.
제자들이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나서 함께 가려고 하였지만,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가자는 음성을 듣기를 좋아하는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을 두려워하는것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길로 주님이 우리를 이끄실때는 기뻐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다른 길들로 인도받을때 그 길에서 도망치지는 않는가?

십자가의 길, 분명 좁은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운데에서도 적은 이들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지금도 여전히 소수지만 이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할때 함께 갈 수 있는가?
제자들도 모두 함께 가는 행동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모두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는지 묵상해볼 필요가 있고,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그 음성에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응답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길이 험하고 남들의 비방을 받고 버림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 마지막에 영광스런 주님께서 우리를 맞아 주실것이다.
세례요한의 마지막이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는 목베이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버려도 된다는 당위성을 제공하진 않는다.
먼저 제자들이 한 행동을 교훈삼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드럽고 사랑스런 음성에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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