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에게 광야가 필요했던 이유


히브리서 11장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출애굽기 2장 11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절.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절.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절.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르시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히브리서에서는 분명 모세는 이 세상의 명예와 낙보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았다.
영적으로 깨어있었고, 한번 뿐인 삶을 이 세상의 즐거움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분명 순전했으나 그의 행동은 많은 교정이 필요했다.
아주 열정적인 모세는 그 동족이 괴롭힘 당하는걸 견디지 못하고 애굽사람을 죽여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동기는 분명 동족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으나, 그 감정은 조절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돌려보내신다.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시간동안 모세를 아무것도 아닌자라는것을 알게 하시며 훈련시키신다.
결국 모세는 그 40년 동안 정말로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걸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주를 섬기기 원하고 그 열정이 정말 높다면 주님은 분명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열정과 순전한 마음을 주님이 받으시고 우리의 모난 부분과 사용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들을 다듬으시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신다.

그 광야는 정말로 복된곳이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는 곳이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통하여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통하여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우리의 어떠한 행동과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어떠함 그 모든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광야뿐이다.

우리가 평생 광야에 머무를순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코스는 필수코스다.
그러므로 모든이들이 우리를 외면하고 배신하였을때, 그때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잊지 말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는데, 모두 배신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배신할때, 그때는 아버지 하나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 찬스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우리들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쓰임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광야로 다시금 돌아가자!!
주님의 멍에는 정말 쉽고 가벼운가?

[마12: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를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해서 부르시지 않으셨다.
주님께 가까이 가는 자들은 주님이 그분의 품안에서 쉬게 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은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멍에가 아닌,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일은 어떠한 것일까? 어떠한 종류이며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그 멍에를 메고 주님으로부터 배우라고 하신다.
그렇게 될때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게 된다고 하신다.

모든 것의 시작과 중간 끝 그 모두를 결정짓는 최고 중요한 기관은 마음이다.
이 마음을 지키게 될때, 이 마음이 쉼을 얻게 될때 우리는 어떠한 일들도 해낼 수 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말이다.

우리가 일에 지쳐있을때..그때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나의 마음이 분주하고 걱정과 근심과 쉼이 없을때, 그 원인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원인은 위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예수님의 일,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그 일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셨다.
이 두가지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깊이 고민해보고 따져봐야 할 것은 이것 두가지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예수님의 일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이란 도데체 무엇을 말하는것인가?
그것의 구체성, 그리고 실제성, 그리고 일어날수 있는 삶에서의 모든것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분석해봐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주님께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주님의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고민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답을 구했다면,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그 다음은 쉽다.
그냥 예수님으로 부터 배우면 된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데는 사복음서만큼 좋은곳이 없을 것이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셨고, 어떻게 시간을 분배하셨으며, 그분의 일의 중요성의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그분이 사람들에게 쏟는 시간들에 있어서 특정분류와 그렇지 않은 분류에서 차이가 있었는지..그렇지 않은지 등을 또 살펴보면서 복음서를 살펴본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펴볼때 제일 중요한것은 또한 예수님의 마음일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게 될것이다.

주님께서 항상 평안하셨던것처럼 말이다.
지금 일로 지쳐있는가?
그렇다면 그 일이 주님의 일인지..
그리고 그 일을 주님처럼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일을 잘하고 못하고 보다 중요한것은 그 일이 주님의 일인지 여부와..
주님이 하셨던것처럼 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6절.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7절.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8절.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주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참으로 비통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과 함께 하실때 사울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고 영광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언을 하였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사울이 아니며 새 사람인 사울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러움을 나타내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는 이러한 영광 가운데 기회를 따라 행할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저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아 알게 된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삶 속에 들어와 역사하였으며 그 역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제 삶 가운데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 기회는 나의 어떠한 의지와 행함에 따라서 결정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의 책임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계획을 이루십니다. 사울은 이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함께 하셨지만,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을 좇아 갔으며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왕위는 다윗에게로 옮겨졌으며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영광은 다윗에게 옮겨졌으며 다윗의 씨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잃어버렸던 것은 단순한 왕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잃어버렸던 것은 그를 통해서 오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의 길을 예비하는 그 엄청난 영광스러운 통로의 길을 그 자신 스스로 버렸고 그 길에서 이탈되었던 것이었씁니다. 우리의 삶이 정비되지 않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졌을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직위를 상실해 버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실상 그 직위와 직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는 통로가 되는 영광스러운 그 직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목사나 선교사의 직분을 가진 것이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것은 표면상으로 보여지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선교사의 직위를 박탈된다면 사람들의 시선과 이목때문에 우리는 힘들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직분을 잃어버려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비난을 받는 고통, 그것은 일시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원한 세계에서 우리가 받을 상급과 우리를 통해서 보게 될 얻게 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 가장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보여지는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곳에서 보여지지 않는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까?보이는 영광을 쫓는 자들은 보이는 것에만 집착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비록 보이는 영광을 얻었을지라도, 그것으로 만족했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영광을 얻지 못할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영광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의 영원한 삶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영원히 만족하지 못할 것에 우리의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배의 결핍이 우상을 찾게 한다.


 요한복음 3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진정한 예배가 결핍되었을 때 오게 되는 목마름과 그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우리 스스로 우상을 만들게 되는 걸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인생의 갈증을 남편을 통해서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 남편을 통하여 자신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이와 같이 전개되는 걸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대답에 사마리아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 물을 달라는 요구에 갑자기 남편 얘기를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갑자기 예배 얘기를 하게 되고 예수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신다. 대화의 전개를 보면 예수님이 영원한 물을 주겠다고 하시고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의 실상(남편으로 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해결책으로 예배를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원한 갈증을 해결하는 영원한 생수는 바로 예배이다. 그 예배는 단순히 주일날 드려지는 형식이 있는 예배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주 목마르다가 주일만 갈증을 해결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전체에 깃들여 있는 예배의 삶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우리가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이 예배의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 예배의 삶 이전에 해결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마땅히 계셔야 할 하나님 아닌 다른 대체물, 우상들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그것을 요구하셨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기 이전에 사마라이 여인이 그동안 찾았던 해결하고자 했던 남편들은 그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려 주셨다.


 우리에게도 그동안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로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자 했던 습관, 소유욕, 자기 성취, 남들의 인정, 칭찬, 자기 의 등 여러가지 많은 것들이 진정한 예배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 그러한 잘못된 습관과 대체물들이 먼저 정확히 확인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예배의 대상인 하니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인생을 통치하실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통치하도록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자리를 내주게 될 때 우리에게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이 생수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영원토록 계속해서 샘솟는 물이 될 것이고 우리 안에서 넘쳐서 주위의 많은 영혼들에게 넘쳐 흐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대체물들을 제거하고 다시금 영원한 생수로 우리의 근본을 채워가는 것이 필요하다.

버리지 못한 죄,습관들을 극복하는 법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열왕기하 18:5~6)”

 

믿음의 경주에서 버리지 못한 죄, 습관들로 인하여 계속해서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지 못하고 낙담하거나 뒤로 뒤쳐지는 많은 믿음의 경주자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열왕기하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의 행동을 통해 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은 여전히 몇 가지 우상들을 남겨두고 섬겼는데, 히스기야왕은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결정과 더불어 행함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는지가 우리가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과거의 죄, 습관들 그리고 육신적인 좋지 못한 것들을 제거하고 이길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5절 말씀과 6절 말씀에서 2가지 구절이 히스기야왕이 모든 우상을 제거할 수 있는 비결로 보여집니다. 두 구절은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여호와께 연합하여 입니다. 그는 우상을 제거함에 있어서 철저히 자기 자신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우상들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여호와와 연합하였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여졌던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옛육신의 습관과 죄악들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모습과 습관들을 앞에 두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전히 옛육신의 열심과 옛육신의 방법들로 이것을 극복하고자 애씁니다. 이러한 것들을 조금은 도움이 되는 듯이 보이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실패하고 마는 모습을 여러 번 경험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육신의 좋지 못한 것들은 오직 성령으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의지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을 의지하였을 때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죄악된 습관들에 더 이상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건넜지만 그는 물에 빠지게 됩니다. 왜 그는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 빠지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주목하고 바라보았던 주님으로부터 시선이 다른 것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환경은 동일하였지만 그는 어느 순간 영광스러운 주님을 놓치고 주위의 환경을 바라보아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 동행하게 될 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 때 죄악된 삶과 이전의 헛된 습관들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금 이전의 육체의 습관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 죄를 짓는 원인의 실제는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에 다시금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으로부터 건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주님이시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과 계속적으로 동행하는 삶(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만이 우리의 모든 좋지 않은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KEY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주님과의 임재를 계속적으로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리지 못한 죄, 습관들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열왕기하 15:3~4)

 

열왕기하를 읽다 보면 위와 같은 구절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증거되는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특별히 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은 두 문구 입니다.


첫 번째로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라는 구절입니다. 이는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희 또한 많은 이스라엘의 왕들과 같이 주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많은 것들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 앞에서 행하는 많은 선행들과 깨끗한 양심으로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섬기는 많은 행위들이 있습니다 이는 주님 앞에 참으로 값진 것들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열왕기하를 읽으면서 제 마음에 주님께서 묵상케 하시는 말씀은 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많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주님 앞에 정직히 행하므로 주님께 칭찬을 받았으나 한가지 크게 잘못한 점이 있음을 성경은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을까요? 여러가지 많은 이유가 있겠지요, 많은 이유 중에서 두 가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위의 말씀에는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백성들이 그 산당을 원해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로는 그 산당이 계속적으로 있어 왔던 것이라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분명하고도 절실한 목적이 그 왕들에게 없었을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 두가지를 개인적으로 묵상케 되었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신분을 입은 자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이지만, 때로는 하나님 앞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나의 모습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둘째는 그 동안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던 죄악된 습관들, 그리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알게 모르게 육신적으로 행하는 습관들을 큰 위험의식 없이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처리하지 않고 그냥 간직하고 있는게 없는지 묵상케 되었습니다. 분명히 저에게는 두 가지 모두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행동, 그리고 아직 여전히 버리지 못한 옛 육신의 습관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산당을 완전히 없애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두고 주님께 기도하며 산당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길 소망합니다. 특별히 히스기야 왕이 이 산당을 제거하는 걸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말씀 전체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는 우리 안에 있는 남아 있는 산당이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앞에 회개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조금씩 남아 있는 옛 육신의 습관들과 주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우상들이 온전히 제거되어 거룩하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계속적으로 역사하길 소망합니다.


"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그분은 하나님이면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셨다.

 우리가 이땅에서 잠시 받는 고난은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때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절실하며 그 고난 가운데서 주님이 배우신 순종함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찾기가 어렵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때 우리 마음에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배우신 순종함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아니 고난을 주시는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고난 자체는 우리에게 피하고 싶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 고난 가운데서 주님이 친히 배우신 순종함을 우리도 배울 수 있다면 그 고난이 다른 어떤 교훈보다도, 다른 어떤 배움보다도 더욱 우리에게 빛난 보석의 역할을 할 것이다. 나에게 닥치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께서 친히 배우고자 하셨던 그 고난을 배우길 소망한다. 비록 힘들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때도 그분께서 친히 홀로 담당하셨던 그 길을 묵상하며 그 분이 배우길 원하셨던 그 순종을 나도 배우길 원하며 앞선 선진들이 배우고자 했던 그 순종함을 나도 배우길 원한다.

 그것이 이땅에서만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우리가 아버지를 뵙게 될때는 더 이상 경험적으로 배울 수 없는 일이기에 이 땅에서 이 일을 피하고 괴로워 하기 보다는 기쁨으로 능동적으로 이것을 천국을 침노하듯이 나의 것으로 체득하며 배우는 것이 이땅에서의 복된 삶이라 여겨진다.


마태복음 6: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주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심으로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동일하게 비추시며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는 동일하며,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습니다. 나같은 죄인도 끝까지 인내하시며 그 은혜를 계속 부어주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누구도 차별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단, 이 땅이 끝나는날 모든 인생이 죽음을 통과하고 그 분을 보게 되는날 그분은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그 전까지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계속 주님의 은혜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든이들이 이 진리를 알기를 소망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죄악에서 벗어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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