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창세기 1장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누가 뭐라고 하든, 성경은 해와 달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해와 달을 창조하신 이유를 창세기 1장 16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태양은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한다.'는 분명한 사명감을 태양과 달에게 주셨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빛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매일 새로운 하루가 주어질때 단 '하루'만이라도 태양이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까?

 

 상상해본다면 일단 모든 사람들이 굉장히 두려움을 느낄것 같다.

 그것이 사람들의 첫 반응이라 생각이 든다.

 

 밤에 비취는 달은 어떤가?

 밤에 달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더 이상 밤에 달을 필요로 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분명 낮에 비하여 밤에 달은 우리에게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달이 사라져서는 안되겠지만, 최소한 현대인의 삶에 달이 주는 영향은 과거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작은 광명체인 달이 밤을 주관한다고 이야기 한다.

 인류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달이 밤을 주관할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변의 밝은 조명들로 인하여, 보름달이 이전 과거에 비하여 밝게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별들도 이제는 더 이상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인류 문명의 결과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밤의 아름다운 조명들이 하늘의 달과 빛의 밝음을 어둡게 만든것이다.

 그래도 달과 별들의 빛을 없애지는 못하는것 같다.

 

 사람들은 추석을 맞이하여 보름달을 보면서 무엇인가 여전히 소원을 빌기도 한다.

 지성과 이성이 넘치는 시대에, 그리고 과학의 놀라운 발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것일까?

 '달'이 아무런 능력이 없고 무엇인가 실제로 도와줄 수 없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도데체 

 "왜?"

 

  아마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밤을 주관하게끔 하는 그 능력을 거부하지 못하는것 아닐까?

 달에게서 느껴지는 위엄을 어찌하지 못하는것 아닐까?

 

 진리를 아는자들은

 달의 비밀과 해의 비밀을 알고 있다.

 

 달과 해를 통해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1년에 한번 있는 추석.

 평소에는 잘 보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날만큼은 가족들과 모여서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소원을 빌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감성에 젖어들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기에 자유롭게 우리는 이런 저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달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참 뜻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아니, 그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사실 타락한 죄인들의 본성이지만,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준 것 또한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추석을 맞이하여..

 보름달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창세기에 기록된

 밤을 주관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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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삶의 짐의 무게는 어떤가요?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나라

 

휴가시즌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바캉스'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놀고, 먹고, 즐기고 등등이 떠오른다.

아니면, 이곳저곳 많은곳을 다니는 그러한 여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캉스(vacance) 말의 어원은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인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또는 "비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도 많은 변화로 인하여 이러한 비움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너무 삶이 고되고 힘들어 모든것을 내려놓고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속에서 볼 수 있는듯 하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비울때 다시금 채워지는걸 경험하는 문화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참된 쉼, 휴가란 무엇일까?

 

우리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모든 인생은 각자 나름의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니고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는 말씀이다.

 

28절보다 중요한 말씀은 29절인데,

이유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실 수 있는지와 어떤 쉼을 줄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29절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29절 마지막에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우리 삶의 여러가지 문제들, 어려운 점들, 짐들의 원인을 곰곰히 따져보면,

대부분 걱정과 염려, 근심등 마음의 문제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초조함으로 인하여 현재를 잘 살지 못하는 현상들.

그리고 현재의 괴로움이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들.

다양한 문제와 어려움의 대부분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쉼은 우리의 환경이 나아지거나,

삶의 불편한것들이 해소되고 더 나은 삶이 되는것이 아니다.

분명 우리의 삶의 배경, 환경들은 이전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다.

주변의 환경들, 나의 일의 성취 등 많은것들이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할지라도 나의 마음은 괴로울 수 있다.

많은것들이 이전보다 더 나빠지고 있더라도 나의 마음은 기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어떻게 기뻐하고 평안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쁨과 평안 가운데 계신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본인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배우게 될때, 우리도 진정한 쉼을 얻고 누릴수 있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울때 우리 삶은 항상 휴가처럼 쉼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의 멍에를 주신다고 하셨다.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멍에' 를 잘 메고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게 될때,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멍에의 특징 중

첫번째는 쉽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가볍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감당하고 짊어지고 있는 짐이 혹시 무겁고 어려운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멍에가 아닌 나만의 멍에나, 다른 욕심의 멍에를 메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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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다 큰 좌절과 혼돈속에서 방황할때가 있다.

삶의 고난은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고난은 그저 우연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일 수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되었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그 속에서 숨겨진 하니님의 뜻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러가지 고난중에서 우리를 아주 혼란스럽게 하고,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때 극도로 어려워하고 심한 경우 자살에까지 이르게도 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사실상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섭리가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승승장구하던 사업가가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는 경우가 있고,

대기업 임원에 대표까지 승진하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권고사직등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어떠한 일도 못찾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그뿐인가? 잘 나가던 운동선수가 부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운동선수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유명한 연예인이 교통사고로 더 이상 연예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위기에서 잘 이겨내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 어려움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위기가 본인에게 다가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특별히 내 정체성이 어떠한 사회적인 위치나 직업에 올인되어 있던 사람들의 경우 아주 위험할 수 있다.

그들의 정체성은 사회적 위치와 직업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러한 위치와 직업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큰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감은 극도로 떨어지고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하여 심한 우울증에 다양한 정신질환을 겪게 된다.

 

이러한 일이 내 삶에 벌어질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1~12)

 

 

예수님이 광야로 시험받으러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이러한 상황을 이겨내고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내 사랑 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말을 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 내셨다.

 

아주 적극적인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작품(?)이었다.

다만, 광야의 시험전 성부 하나님의 처방전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이 말 한마디였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태도 였다.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이 천지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결과물을 낼때 그 결과물로 인하여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많이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우리들이 좋은 결과물을 내지 못할때 사람들이 슬퍼하거나 비난, 무관심한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세상은 실로 그러하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것이기 때문에 열매와 결과물들에 우리의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하신다.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들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으로 기뻐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다시 일어서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실로 그러하기에

우리의 믿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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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장 1절)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날 예배할때 기쁨과 감격을 느낀다.

찬양할때 감정이 고조되고 눈물과 함께 우리의 삶을 드리기로 작정한다.

교제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경험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없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한번 쯤 검증해보는게 어떨까?

 

오늘은 이러한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또 다른 경험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기쁨과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나서 집에오니, 집이 엉망이다.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내와 남편도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나는 또 다시 아이들과 아내,남편에게 화를내고 있다.

그리고 불평,불만이 그냥 속에서 터져나온다.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내가 언제 눈물로 주님앞에 나의 삶을 드리기로 작정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중적인 나의 모습에 더 우울감과 함께 절망감이 다가온다.

나는 실패자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삶의 현장에서는 주일날 예배 드리듯이 기쁘게 살수 없는것인가?

여러가지 의문과 함께 그냥 주일과 일상을 구분해서 다르게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원래 사람은 다 그런것이라며..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 모습에 아이들은 놀라지 않고 똑같이 그리스도인은 원래 이중적이구나..이렇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받아들인 현실로 인하여, 아이들은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인하게 된다.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최소한 가장 가까운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부모는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 오히려 자녀들을 압박한다.

강제로 회심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렇게 회심되는 일은 없다.

 

 

로마서 12장1절에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우리의 삶이, 살 전체가 거룩한 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어려운 일인줄 안다.

그래서 쉬운일에는 전심을 다해서 우리를 드리는것 같지만,

정작 해야하는 삶의 현장에서는 전심을 다하기 보다는 두 마음을 품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 누구도 삶의 현장에서 승리한 것들을 잘 알려주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므로, 본보기가 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것은,

삶의 아주 작은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일을 잘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배우기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지 않고 오직 주님께로만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에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사는이를 찾기 어려운건,

우리 인간의 본성이 원래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지독히도 갈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본성을 거스르는것.

거기서부터 삶의 예배가 시작된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기 위해서는

역시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직 주님앞에 바로 서 있는것...그것밖에는 없다.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것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기도하는것.

 

그길만이

우리를 이중적인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삶의 어디에서나

동일한 '나'로, 동일한 '그리스도인'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준다.

 

코람데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을 매순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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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일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서 마지막 날을 지내는 이도 있을것이고,

그 사실을 모른체 평소와 같이 오늘을 지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나 '하루'는 마지막일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날'

무엇을 해야하며..

누구랑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러기에는 24시간은 너무나 짧다.

아니, 100년도 사실 너무나 짧다.


이렇게도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데

사람들은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한채 고통과 괴로움과 불평과 짜증들로 시간을 채워나간다.

혹 그 중에 선한일을 하고 남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다.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 이렇게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체'가 보여진다.

이제야 '인생'을 조금 알게 되는 것일까?


항상 '죽음'이 코 앞에 있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모습들..



모든이들이 거대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 거대한 목표를 이룬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 소수마저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모습.


그리고 거대한 목표에 이루지 못한이들은

어떻게든 그 거대한 목표에 도달하고자 중요한것을 뒤로한 채 끊임없이 매진하는 모습

그리고 그 길에 동참하지 못한 이들을 '낙오자' 취급하는 사람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렇게 믿으며 행동하는 이들은 거의 볼 수가 없는 세상

이것이 실제임을 깨닫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제대로 가르쳐 주는 올바르고 지혜로운 선생이 부족한 시대


이러한 시대에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내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해야 할 사람들을 깨닫고..

오늘 하루를 놀라운 축복의 선물로 깨닫고 힘있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무엇인가 시대와 세상을 변화시키려 살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것에 감사와 최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인이 아닐까?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에는 '거품'이 생겨 버린다.

그 '거품'을 깨닫는 이들은 적다.


그 '거품'이란..

세상을 변화, 개혁 시키고자 시작했으나

나를 유명하게 하고 싶은 '욕망'으로 변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작이 좋았기에..

변질된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권좌에 앉게 되었을때는 이미 눈이 어두워진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단한 업적보다

위대한 사상보다


'현재의 나'

' 그 주변'

' 주어진 일'

에 대한 감사와 행복으로 하루를 사는것이 진정 지혜있는 자가 아닐까?




희망을 먹고 사는 인생.



"당신에겐 꿈이 있나요?"

"아니, 그 꿈을 이룰수도 없는데 뭐하러 꿈을 가집니까?"


"그래도 꿈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것이 아름다운 인생이에요.."


"그럼 당신은 지금 현실에 만족하시나요?"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인생이란..

어릴적 가장 큰 꿈을 꾸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 꿈이 이룰수 없음을 깨닫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그런데 현실에 적응해서 사니, 인생이 행복하지가 않다.

다시금 꿈을 꾸기에는 너무 철이 없는것 같기도 하고, 내 꿈이 뭔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그냥 다른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사니깐, 나도 그렇게 사는것이 맞는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사는 인생이 되는것일까?

이것이 바로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니깐.

나도 특별하진 않으니깐 그냥 평범한 대중이 되고 싶은것이다.



그런데..

분명 모든 인생은 특별하다.

우리는 무언가에 속아서 평범한 대중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안전한곳이 있을까?

그리고 모두가 똑같아질수가 있을까?


희망이 있다는 것.

꿈이 있다는 것.


그것은 죽을때까지 놓치 말아야 할 인생의 본분이다.

모든이들이 이 땅에서 분명히 각자가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

그리고 모든이들이 이 땅에서 분명 각자의 색깔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은 그래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것 아닐까?


많은이들이 일부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것은 인생의 비극이다.

모든이들이 각자의 특색을 나타낼때, 인생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안그래도 비극적인 인생인데, 그나마 색깔있게 살아야 비극적인 인생가운데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지 않을까?


모든이들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꿈과 희망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이 우리를 오늘도 힘있게 살게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자.

그것은 '인생'을 포기한 자다.

 

때때로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듯 하다.
분명 본인들이 지은 죄를 가지고 본인들이 회개치 않고 사탄에게 그 책임을 돌리기 때문이다.

전혀 사탄은 그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어떠한 영향력도 주지 않았는데 사탄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도록 하는데 최고 1인자다.
그리고 사탄은 그의 추종세력들과 함께 많은 이들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그 일에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런데, 어쩔때는 사탄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도 계획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일들이 있다.
그일을 사탄은 참 좋아한다. 그런데 사탄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기도 하다.
왜냐면 사탄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는데, 죄를 지은이들이 그 원인을 사탄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니 방해하기 위해서 세운 전략이야."
"사탄이 우리 가정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자기와 나를 해방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인듯 하나 정확하게 그 죄의 원인을 사탄으로 결론짓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대화들이다.

야고보서 1장 14~15절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 야고보서에서 얘기하는 한가지는 욕심을 그 원인으로 얘기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 중심에 그가 원하는 자기 욕심이 있으며, 그 욕심에 의하여 사람들이 미혹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욕심을 제어하지 않고 뿌리 치지 않으면 그 욕심이 무엇인가를 생산한다고 한다.

사람이나 동물만이 자녀나 새끼를 낳는것이 아니라 이 '욕심'이라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떠한 분명한 실체도 자녀(?)들을 낳는다고 한다.
그 욕심의 자녀는 다름 아닌 '죄'다.
또한 그 '죄'가 자라서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모두 죄인들이다.
죄인들중의 특성중 하나는 '자기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적당한 욕심이 있어야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욕심'이 과해지거나 그 '욕심'을 이루고자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고 주위의 사람들의 가치보다 본인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더 높아져 있을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욕심'이 원하는데로 내어주면 결국 '욕심'이 잉태하게 되고 '죄'를 낳게 된다.
그 '죄'로 인하여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어두움에 처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어두움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는 그 죄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해야 한다.

사탄이 방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탄이 아니라 내 안의 욕심이 여러 죄악들을 낳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원인을 사탄에게 돌려서 남탓 할게 아니라, 내 마음 중심의 욕심을 파악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외부에 있지 않으며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탄'에게 핑계 대지 말고 내 마음 속의 '욕심'에 대해서 민감히 반응하고
욕심에 이끌려 죄에 이르렀다면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으로 하여금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사탄에게 죄의 화살을 돌려서 스스로 합리화 하지 않고,
회개하여 깨끗한 양심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하지 않을까?

이상한 말로 들릴수 있겠지만,

사탄도 얼마나 억울할까?를 한번 생각해보자!!


 

모세에게 광야가 필요했던 이유


히브리서 11장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출애굽기 2장 11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절.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절.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절.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르시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히브리서에서는 분명 모세는 이 세상의 명예와 낙보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았다.
영적으로 깨어있었고, 한번 뿐인 삶을 이 세상의 즐거움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분명 순전했으나 그의 행동은 많은 교정이 필요했다.
아주 열정적인 모세는 그 동족이 괴롭힘 당하는걸 견디지 못하고 애굽사람을 죽여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동기는 분명 동족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으나, 그 감정은 조절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돌려보내신다.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시간동안 모세를 아무것도 아닌자라는것을 알게 하시며 훈련시키신다.
결국 모세는 그 40년 동안 정말로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걸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주를 섬기기 원하고 그 열정이 정말 높다면 주님은 분명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열정과 순전한 마음을 주님이 받으시고 우리의 모난 부분과 사용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들을 다듬으시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신다.

그 광야는 정말로 복된곳이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는 곳이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통하여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통하여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우리의 어떠한 행동과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어떠함 그 모든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광야뿐이다.

우리가 평생 광야에 머무를순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코스는 필수코스다.
그러므로 모든이들이 우리를 외면하고 배신하였을때, 그때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잊지 말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는데, 모두 배신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배신할때, 그때는 아버지 하나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 찬스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우리들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쓰임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광야로 다시금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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