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는가?

19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정착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한국사회도 일부 자영업자들, 사업가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나 어떠한 조직에 속하여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이다.

회사를 다니는 많은 이들이 창업을 꿈꾼다. 창업을 꿈꾸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이들은 적다.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이유 중 가장 큰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회사생활을 하면 여러가지 어려운 고충들이 많지만 가장 좋은건 달마다 항상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은 매달 동일하게 들어오는 수입에 맞게 생활 패턴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그 수입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 이유는 매달 나가야 하는 대출이자, 카드값 등이 있다.
당장 그달의 수입이 들어오지 않으면 대출이자와 카드값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것이 대부분의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활패턴일 것이다.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피해자일수도 있으며, 그 피해자라는 인식을 하기 전에 이러한 자본주의를 스스로 즐기는 대부분의 대중의 힘일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 사회 체제속에 살면서 그 자본주의가 말하고자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안타까운 현대인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러한 바쁜 생활가운데 우리는 월급을 받으며 살지만, 그 월급을 주신이가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 하나님이 주신 월급이라고 믿는이들은 얼마나 될까?

 

내가 그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다.
당장 다음 이직할 직장을 구하지 않은채, 사직서를 낼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보면 된다.
이 말이 너무 급진적인가? 물론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급진적'이기보다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많이 익숙해져서 '성경'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관가 멀어져 있다고 보는것이 더 올바른 견해같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들이다. 입술로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행함으로 삶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실 가장 기초적인 필요인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신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을 실천에 옮겨서 사는 이들은 극히 소수인듯하다.

일부 선교단체들은 Faith Mission을 실천한다. 후원자를 모집하지 않고 죠지뮬러와 같은 기도로 또한 믿음으로 자신의 경제적 필요를 공급받고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단체들의 가치관은 참으로 우리에게 모본이 되는것 같다. 그렇다고 후원자를 모집하고 그 후원자들로부터 생활비와 사역비를 지원받는것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어느것이 더 가치가 있다라고 말할수 없지만, 우리는 Faith Mission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시대인것 같다.

사실 Faith Mission이라고 명칭이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이 Fatih Mission 아닌가 생각해본다. 세상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사역하는 사역자들이나, 세상직업을 가져서 일정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 직업을 주신이와 그 사업을 잘되게 하셔서 월급을 받을 수 있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세상직업을 가진 이들도 Faith Mission이어야 한다. 물로 그 구조상 우리가 믿음을 실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기본 정신은 그렇게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어느 순간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게 된 돈이고, 현대 자본주의가 탄생하였던 배경처럼 나 또한 이윤을 축적하는 자본가가 되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이 아닌 돈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살린다는 생각보다는 통장의 잔고가 우리를 먹여살린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통장의 잔고가 의지의 대상이 되고, 통장의 잔고가 떨어지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기 보다는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에서 자유로울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싶다? 나 또한 이런데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혜택을 맛보며 사는 현대적인 그리스도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폐해속에서 괴로워하는 안타까운 그리스도인들인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우리의 가치관을 다시 정립해야 할까? 
먼저는 자본주의가 확립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정착된 핵심적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역사상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농업의 시작과 함께 제한적으로 존재하여 왔다. 일부 학자들은 중세의 길드를 자본주의적 관계의 맹아로 파악하기도 한다.(일례로 도제를 임금 노동자의 기원으로 파악하는 것) 그러나 중세 사회는 신분제에 의한 제한, 과도한 세금, 지역마다 부과되던 관세, 강제로 부과되는 고율의 이자 등으로 인해 이윤을 창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영국에서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이윤을 축적한 자본가가 등장하였으며 19세기에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정착되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이전 시대에서는 개인이 이윤을 축적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런데 18세기부터 이윤을 축적하는게 제도적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 말의 핵심은 자신의 신분배경과 상관없이 이윤을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든 개인에게 열렸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 이윤을 축적하는데 성공한 개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지배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에 성공한 지배계층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체제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본주의 체제속에서 우리 인간의 욕심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돈을 모으는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잠언 23장 4~5절
 4절.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5절.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성경은 '부자'는 '죄인'이다 라고 말한적은 없다. 성경은 항상 부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지만, '부' 자체를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많은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중에 '부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부자 되기에 애쓴 적은 없겠지만, 그들은 부자가 된적이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자를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나쁘게 보는 시선은 버려야 할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건 성경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것을 얘기한다. 그 '부'는 허무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재물'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갑자기 날아가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살펴보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태복음 6:11)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누가복음 11:3)

분명 오늘날의 상황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 기본 정신은 지금도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루하루 살아갈것과, 그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주님께 기도로써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생활양식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한달 월급을 받고 있으며, 또한 공무원이나 평생직장이 가능한 이들은 하루가 아닌 노인이 될때까지 안정적인 수입원이 있기 때문이다.

 

노후대책까지 다 가능한 사람이 이러한 기도를 과연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에게 양식이 넘치고 매일매일 먹는것에 대해서 모든 필요가 다 채워져 있는데 위의 기도는 도데체 누구에게 적용이 가능한 기도일까? 저 기도는 일정한 봉급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과, 그리고 사역비가 적은 사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기도일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위와 같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사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기도라고 언급을 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그와 같은 특정 대상은 찾을 수 없다.


출애굽기 16장 4절
 (개역개정)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공동번역)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

출애굽기 16장 4절의 공동번역을 보면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 들이게 하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루', '하루'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것에 대한 중요성을 여러번 언급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개척하고 우리 삶을 '돈'으로 보호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기보다는 통장의 잔고와 안정적인 직장을 의지하는게 쉬운 현대인의 삶 아닐까?

성경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한번도 가볍게 여긴적이 없다. 우리에게 먹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한 가정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성경은 게으른 자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으며, 열심히 일할것을 계속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또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열심히 일하더라도 그 '일자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 '일'로 인하여 받게 되는 물질적인 축복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이 주신 축복아래 살면서 그 축복인 '안정적인 직장', '통장의 안정적인 잔고'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주신 하나님을 매일 매일 신뢰하며 살아갈 것을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안정적인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가진 통장의 잔고가 내 힘으로 번 돈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인가?
그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것인가? 아니면 사용할때마다 주님께 결재를 받고 써야하는 것인가?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 안에서 경제적인 쉼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통장의 잔고를 바라보며 경제적인 쉼을 누리고 있는가?

 


 

 




우리는 언젠가부터 영적인 일과 세상적인 일을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와 교회에서의 모습이 사뭇 다른것들을 볼 수 있다.
직장에서의 동료들의 평가와 교회에서의 평가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직장과, 교회와 가정에서의 평가가 모두 다르다.

그럼 어디에서 누가 하는 평가가 가장 정확한 것일까?
모든 평가가 잘못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의 평가는 많이 다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의 평가보다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평가다.
우리가 이것을 잃어버리면 믿음의 길에서 파선될 수 있다.

우리는 직위와 직분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와 교회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목사, 선교사 등을 더 영적인 사람으로 이해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목사와 선교사등의 full time 사역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그들이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많은 고충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포지션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그리스도인보다 더 영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반대한다.
아니 그러해서도 안된다. 그 사람이 가진 포지션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을 우리 스스로 평가하거나 판단 할 수 있는 자격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우리의 생각속에 있는 것들을 점검 해 보기는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들을 더 영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메세지가 훌륭하면 그를 더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메세지의 훌륭함과 그의 영성과는 관계가 있을수도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왜냐면 메세지의 훌륭함은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그 은사를 받아서 노력한 결과로 더 먹기에 좋은 음식이 될 순 있겠지만, 그러한 노력은 주신 선물로 인한것이지 그가 더 영적으로 성숙해서 그런 것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전한 메세지 그리고 그의 삶이 일치된다면 그는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그를 성도들은 존중하고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한 메세지와 그의 삶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의 메세지는 존중받되, 그는 존중받아야 하는 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메세지가 성경적인 메세지인지 검증되어야 하는 것은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다.
모든 메세지를 아무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에 왜 계속적으로 거짓선지자들을 경계하는 말씀들이 있겠는가?

'제자'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269번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세 번 나오는데, 정확히 얘기하면 예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처음에 등장했다.
사실상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제자가 되는것을 동일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제자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받음과 동시에 제자가 되었다고 얘기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일꾼이고 사역자이다.
구원 받음과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사역자들이 된 것이다.
사역의 역할과 시간을 배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상이하다.
그가 가진 은사와 재능과 배경과 삶의 형태와 지역과 시대와 여러가지것들이 고려되어서 그가 하는일이 정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것의 고려 없이 full time 사역자들을 더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더 영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고전12장 8절에는 어떤이에게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 예언함, 영들 분별함 등을 주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28절 이하에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것, 다스리는것 각종 방언 말하는것 등의 은사를 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에서는 모든이들이 선지자와 교사 등을 더 가치있는 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교회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 역할을 반드시 해야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인생의 full time을 말씀 연구와 실행, 가르침에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몇 안된다. 그건 가지고 싶어서 가질 수 있는것도 아니고 주님편에서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러한 역할을 모든 이들이 동경하고 그일이 더욱 가치있는 일인것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교회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은사대로 섬겨져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어진 은사에는 더 귀한것도 덜 귀한것도 없으며 모두가 동일하고 똑같이 가치 있는 일이다.

같은 의미로
교회안에서의 일과 교회 밖에서의 일의 중요성은 동일하다.
어떤것이 더 가치있고 어떤 것은 덜 가치있는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대로 그 사람이 그 일을 기쁨으로 할때 그 일이 곧 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일의 범위와 경계 그 일의 태도에 있어서 정직, 공의, 성실, 양심에 청결함 등이 그것을 영적인 일로 가능케 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순간 그 경계를 단순히 교회 밖의 일과 교회 안의 일로 결론을 지어 버렸다.
그것은 성경과는 멀어진 것이다.
심하게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의 속을 그 누가 알랴?

성경은 집안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과, 설겆이 하는일, 그리고 거리에서 지나가다가 휴지를 줍는일, 그리고 누군가를 도와주는일, 그리고 교회안에서의 여러가지 영적인 봉사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섬김들 그 모든 것들을 동일한 가치로 두고 평가 하는 것 같다.
그 일의 성격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일을 함에 있어서의 그의 내면의 상태, 동기, 하나님과 함께 행함의 여부 등이 성경이 지지하는 바이다.

내가 직장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일을 하고,
집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아내를 돌보며, 남편을 섬기고, 집안 일을 하고,
그리고 교회에서 주어진 은사대로 그 역할들을 해낸다면
그 어느것 하나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귀하고 모든것이 가치 있고 모든것이 영적인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과 동기가 어떠한것인가와,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주님과의 동햄함이 우리의 일의 가치를 평가 하게 될 것이다.

나는 혹 어떤 일은 귀히여기고 어떤일은 반대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혹 어떤 사람은 더 귀히 여기고 어떤 사람은 덜 귀히 여기지 않는가?
나는 혹 직장과 교회와 가정에서 다른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혹 내 은사가 아닌데, 남의 은사를 탐내지는 않은가?

나는 혹 내 위치가 아닌데 그 위치에서 주는 명예와 인기를 탐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부르심, 빌립보서 3장 10절~14절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의 부르심은 어디로부터 오는것인가? 그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 부르심은 일시적인 부르심인가 영원한 부르심인가? 이 땅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 계신 곳은 영원하신 곳이다. 그 영원한 곳으로부터 온 부르심은 영원한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부르심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어떤것인가? 직장의 삶으로서의 부르심, 가족관계로서의 부르심, 일꾼(목사,선교사)으로써의 부르심 등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에서의 부르심은 이땅에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부르심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부르심이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의 부르심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위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 부르심 조차 이 땅의 일로 축소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시어 이 땅에서 필요한 직분과 부르심을 주신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과 부르심은 영적인 일로 보여지는 일일 수도 있고, 영원과 관계성이 높은 부르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땅에서의 부르심이 반드시 영원한 부르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영원한 곳에서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사도바울이 믿었고 추구했던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그가 맡고 있었던 이방인의 사도직이었나?
그가 맡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은 그의 삶 전체에서 너무나 중요하고 가치있는 직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에게는 더 이상 그 직분을 영원한 곳에서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 영원한 곳에서 가지고 있는 사도바울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그는 어떠한 부르심으로 영원한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가?

그것은 10절과 12절에서 어느정도 추측해볼 수 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리고 12절에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기 위해서 달려갔다고 했다.

육체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부활의 몸을 입는 소망,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우편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서 경험하셨던 고난,
이 두가지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사도바울의 부르심이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삶처럼 동일한 삶을 살아내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했던 그 고난을 동일하게 사도바울도 자신의 몸에 경험하고자 하는 것,
그러한 경험들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적으로 가져가는 것들이다.

이땅에서 우리의 직분들은 일시적인것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이상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지식,경험들은 영원한 곳까지 계속 가지고 가는 것들이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에 있어서 일에 있어서의 직분,위치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르심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그러한 부르심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우선순위를 따지고, 무엇인가 구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태생과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잊어버린다면 이 땅에서 많은 칭찬과 열매를 가졌을지라도, 영원한 곳에서의 칭찬과 열매는 이 땅에 비례해서 부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늘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모든 믿는자들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일'을 부여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부여하신 임무였다. 그 '일'이 어떤 것인지 하나씩 살펴보자.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으셨는가를 봐야 한다.
 -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과 닮은 모양으로 우리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피조물은 하나님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아주 닮은 형태를 창조하시고 싶으신것 같다. 그래서 가장 비슷한 모양과 형태로 우리를 만드셨다. 그것은 외모의 어떠함에 국한되기 보다는 지,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영혼을 가지고 각종 감정을 느끼며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일을 하며 또한 하나님이 가지신 여러 속성들을 함께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것의 비슷한 모양으로 우리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봐도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진 모든 속성을 우리도 그와 비슷한 형태로 부여받았다. 우리는 신은 아니지만 신과 비슷한 존재로 지음받은 놀라운 피조물인 것이다.

2) 지음받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은 '일'을 부여하셨다. 그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ㄱ)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가축, 온 땅,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는 것
   첫째는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물고기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다스림속에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어떤형태로 가능했을까? 범죄 이전에는 지금의 몸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수영을 하더라도 좀 더 오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물속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물고기보다 수영을 더 잘해야하지 않을까?
  
 둘째는 하늘의 새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하늘의 새를 다스리기 위해서 하늘을 날 필요가 있었을까? 범죄 이전에는 사람도 하늘을 날 수 있었을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하늘로 부활하실때 올라가셨던 것 처럼, 그와 비슷한 몸의 능력을 혹시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뭐, 그렇지 않더라도 새들을 다스리는데는 큰 문제는 없다. 새들을 불러서 사람 근처로 오게 하면 되니깐..
 
 셋째는 가축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염소, 양, 소, 돼지, 닭 등 각종 가축들을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많은 인류가 계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타락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타락이전에는 가축을 다스리는 것뿐이었지만, 지금은 가축들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식량으로 그리고 농사를 돕는 도구로 그리고 성경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제사제물로써 가축들이 드려지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다스림의 존재로써 가축들이 있었다면 타락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가축들을 볼때 하나님의 타락을 기점으로 한 역사에 대해서 경외감을 가질 수 있다.
 
 넷째는 온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원어에도 '땅'은 특별한것은 아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이 지구상의 '땅'을 의미하는 것 같다. 범죄 이전에는 농사를 짓지 않아서 땅이 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다. '땅'을 다스리는 것, 인간이 어떠한 의미로 이것을 해석하고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범죄 이전에는 아무 '지진'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진'을 사람이 다스릴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땅'을 다스리는 건 어떠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일까? 아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그러한 의미에서 기초적인 이 땅을 잘 다스리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지구'를 인간이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또한 아닐까? 나아가서는 이 땅에 '죄'가 드러오지 않도록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신 명령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여기서는 근거있는 해석보다는 여러가지 추측에 불가한 상상속의 해석으로 그치는 것이 안전할 듯 하다.
 
 다섯째는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고 했다. 기는것들에는 지렁이같은 땅속의 벌레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이 있다. 사실 별로 다스리고 싶지 않은, 별로 볼품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다스리라고 인간에게 명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들이 어찌 사소한 것이 있겠는가? 사람의 눈에는 비록 별볼일 없어보이고 다스릴 필요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모든 피조물이 사람의 다스림이 필요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작은 것까지 다스리도록 명함을 받은 인간의 일은 얼마나 많았던 것인가?

 이와같이 다양하게 주어지고 상당히 많은 양의 일을 과업으로 맡은 인간이 이 일을 어떻게 즐겁고 기쁘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범죄 이전에 슬픔이란 없었을 것인데, 어떤 마음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 일들을 즐겁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분명한 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은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일할 수 있다는 것 만큼 행복한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다양한 일들을 주었음을 상기해보면서 우리가 맡은 일들의 소중함과 이 일들을 맡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조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 하나님이 두가지 명령을 주셨다.
  첫째는 열매를 맺는 삶이었다. 다른 말로는 결실이 풍성한 삶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 주신 땅에서 충만하게 될 것을 명하셨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열매 없는 삶에 대해서 되돌아봐야 할 필요를 보게 된다. 열매 맺는 삶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태초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 열매 맺는 삶의 결과로 이 땅에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넘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대하셨다.

  둘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물고기, 새, 동물,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것들(식물들 포함)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하시지 않으셨지만 분명한건 하나님이 만든 많은 피조물을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 다스림 안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계획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신 지성들을 사용하고 감성들을 사용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이러한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서 계속 놀라움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들이 넘쳤을 것이다. 결국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워가길 원하셨을 것이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우리의 삶에 열매 맺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명하신 각자의 위치와 명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주신 은사와 지혜와 각종 능력들로 하나님 주신 일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함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예배로 드려지게 될 것이다.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1)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채소, 모든 열매들을 사람들에게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느끼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 사람에게 큰 노동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음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수고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사람은 분명히 일을 통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먹을것을 먹인다. 그러나 성경을 볼때 일의 목적이 먹고살기 위한 것은 아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일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길 원해서 였던 것 같다. 일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댓가로 우리에게 재물이 주어지고 또한 그 재물로 우리가 먹고 살기도 한다. 그러나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채워주시는 영역으로 보여진다. 물론 그 먹는것의 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 차이 또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아니고 사람의 범죄함으로 인한 결과이지 않은가?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더욱 사랑하시는 사람을 먹이지 않을리 없다. 물론 게으른 자들은 스스로 굶기도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 하나님은 인생에게는 맛있는 채소와 열매들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다른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들에게 풀을 또한 먹이로 주셨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냥 굶어 죽도록, 그리고 스스로 알아서 자기 먹을 것을 먹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먹을 필요가 있도록 지으셨고, 그 먹을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먹을 것을 주신다. 그런데 '일'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직업(일)의 개념과는 조금 상이한 듯 하다. 

 오늘날로 해석하자면, 교회의 일꾼과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도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먹을것', '의식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치관이 있다면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나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재물을 얻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을 통해서 '재물'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장에서의 월급의 가치로 우리의 직업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월급'을 받는 일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과도 그 '일'에 있어서 차별이나 어떠한 상이한 개념을 갖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주제 : 하나님의 부르심!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사도바울의 부르심과 삶의 소망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의 특징.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사도->보냄을 받은자,대리자.

우리의 사도 -> 그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분

우리의 대제사장 ->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심.

 

11: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  이 땅에서의 삶은 나그네 삶.

(시편 84 :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하늘을 사모하는 것, 나의 하나님은 나를 부끄러워 하실까?

 

11: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상주심을 바라본 모세

 

11: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  더 좋은 부활을 바란 선진

 

12 :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믿음의 선진들, 주를 바라보는 것.


무거운 것 -> 물질을 소유하는 것, 가족간의 유대관계, 안락함을 사랑하는 것, 이동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 등.

얽매이기 쉬운 죄 -> 특별히 불신의 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 믿음의 삶이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확신 필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모범을 보이신 주님처럼 우리도..

출애굽기 35:31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며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창조로 인하여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원래 내것이 없으며 주신이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은 그대로는 사용하기 어려우나,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될때 그 모든 것들은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주의 영이 충만하게 될때, 성령충만할때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보기 힘든 것들을 하게 되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들을 실제적으로 경험케 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주의 영이 충만할때 우리는 그 가운데서 빛을 발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모든 일들 가운데 주님의 빛을 드러내시길 원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재능을 주시고, 그 재능이 성령충만함으로 쓰여지게 될때 주님은 빛을 발하십니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이지만, 내안에 주님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빛을 나도 보고 내 주위의 사람들도 보게 되길 소망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