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 18장 36절)



우리는 누구의 왕국을 세우기를 원하는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권력으로

어떤 사람은 사역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고, 그곳에서 자신의 뜻에 복종되거나 이루어지는 일을 두고 기뻐한다.

그것이 인생의 깊숙한곳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이므로, 그런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거나, 본인을 아직 잘 모르고 하는 말일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깊숙한곳에 자리잡은 이 욕망.

그 욕망이 포장되어서 명예나, 사람들이 존경받는 위치나, 가장 위험한것은 종교적인 위치로 자리잡을때 우리는 스스로 속게 된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왕국이 아닌 이것은 신의 왕국이라고 자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던 모든 이들이 한순간에 떠나버린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본인도 깨닫게 된다.

아..내가 100% 그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그분께서 우리를 그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실까?


그런일은 종종 있을 수 있지만 많지는 않은듯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있다면, 사역보다는 자기점검에

사람들이 원하는 일보다는 주님이 원하는 일을 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적게 들린다면..그것이 바로 경고의 소리다.

내 왕국을 세우려고 자신을 속이고 남들을 속이고 결국 스스로 속인 결과에 자신의 헛된 믿음으로 모든것을 포장하게 된다.


그 포장은 자신의 가장 의롭고 선하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충성된 종이라고 믿게 된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인생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라는것을 깨닫을 수 있다.



나의 왕국인가?

주님의 왕국인가?

나는 왕좌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가?

왕좌의 자리 옆에서 그분의 영광과 위대함과 완전함에 매료되길 원하는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척하길 원하는가..

아무것도 없기에 온전하신 그분 옆에서 온전해지기를 원하는가..


작은 차이지만,

이 차이를 깨닫고 삶에 적용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이 모든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땅에 속한것이 아니다.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내려오셨을때, 그분의 왕국은 실제로 우리들에게 보여졌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본 이들이 무척이나 적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 왕국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 왕국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왕국이 이미 제자들에게 와 있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있다.

그 왕국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나만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끼여서 괴로워하는가..










약자 편에 서는 것.

인간은 본능적으로 의도적으로 약자보다는 강자편에 서게 되어 있다. 그것이 부든,권력이든,명예든..

그러나 부와 권력과 명예라는 겉으로 보여진것에 감추어진 인간의 악함을 본 자들은..그리고 그러한 강자의 힘으로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억울함을 제대로 당해본 이들은 더 이상 강자편에 서는 것이 불편해진다. 최소한 양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러하고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인생에서 아픔과 슬픔을 많이 당한다는것은 더욱이 세상에서 소외받고 외로운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얻게 되는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악하고 앞으로도 악할것이며, 강자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 억울한자들, 상처받은자들, 더 이상 꿈과 희망도 사라지는 이들은 계속 있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는자들에게 위로가 되셨고 없는 자들에게 풍성함을 가져다 주셨다. 그리고 천한자들에게 하늘의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가장 높은 지위를 주셨다.

강자편에 서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고 약자편에서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 이 시대의 사명이 아닐까...





그들만의 리그!


'믿음'을 가진 이들.

'하나님'을 믿는 이들.

그래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로 살아가는 이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이와 같이 세상에 부르셨고, 하나님 나라에 가기전까지 이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세상에 두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는듯 하다.


나에게는 아직 어린 세자녀가 있다.

첫째는 아들이고 7살이다. 이제 제법 대화도 되고 자기만의 취미생활(?)도 생기는듯하다.

그리고 둘째인 딸이 있다. 딸은 4살이다. 

셋째도 딸인데, 셋째는 16개월 되었다. 이제 막 걷고, 아직은 존재감이 없지만 젤 손이 많이 가는 자녀다.


우리집 거실은 나름 큰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로 거실에서 많이 논다.


어느날, 첫째가 거실에서 기찻길을 만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와 셋째가 만드는걸 방해한다.

첫째는 역시나 짜증을 낸다.


그래서 내가 개입하였다.

방해받지 않으려면 너 방에서 문닫고 기찻길 만들라고 하였다.

거실에서 놀려면 둘째 셋째가 방해하는건 감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명이서 사이좋게 같이 놀던지, 원하는 기찻길을 자기스타일대로 만들고 싶으면 자기 방에서 문닫고 조용히 만들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한 이유는, 거실에서 둘째 셋째가 조금 방해하더라도 같이 즐겁게 놀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조금 포기해야 하는것들이 있다.


첫째는, 방에 들어가서 혼자 놀지 않는다.

물론 동생들이 방해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런데, 방에서 혼자 노는건 더 싫은가 보다.


부모의 마음은 첫째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아니..손해가 아니라 자기 스타일대로 기찻길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동생들과 사이좋게 기찻길을 만들고 놀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물론 둘째, 셋째가 기찻길을 엉망으로 만들것이다.

엉망인 기찻길에서 놀 수 없는가?

놀 수 있다.

혼자 노는것 보단 엉망인 기찻길에서 동생들이랑 같이 노는것이 더욱 재미있는 일이다.

그걸 우리 첫째는 아는듯 하다.


항상 나의 제안대로 하지는 않지만, 자기 방에서 혼자 논적은 없는것 같다.

혼자노는것보다는 동생들이랑 같이 노는게 좋은가보다.


우리 집에서 '거실'은 아빠, 엄마가 주로 활동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놀아야지 아빠, 엄마가 같이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는 공간이다.

첫째가 자기방에 들어가서 놀면 자기 뜻대로 기찻길은 만들고 그 기찻길 만든것을 방해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거기는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고, 동생들도 없다.

아직은 우리 첫째는 그러한 것보다는 아빠, 엄마, 동생들이랑 같이 있는게 훨씬 좋은가 보다.


교회도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서로 교제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사실 많지 않고, 그 범위도 넓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들이다.


하나님에 관한 것들(하나님의 거룩하심,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삼위일체, 전능하심, 전지하심, 하나님의 유일하심(유일신) 등..)

이러한 것들에서 일치한다면,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일치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끼리 교제하지 않고 자꾸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직업관, 종말론, 사소한 교리적인 부분들, 성경해석에 있어서의 다양성(차이들), 교단, 문화적인 차이 등)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들(본질적인것들) 이외에 중요하지 않은(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이해하고 서로서로 받아줘야 한다.

서로서로 받으라는것이 다른 생각과 다른 가치관이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여지를 항상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치관들에 대해서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는 어쩔수 없이 그들만의 리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만의 리그란,

우리 첫째 아이가 드넓은 거실에서 아빠, 엄마, 동생들과 놀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마음에 맞는 이들과만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동일한 이들과는 함께 하지만, 그들과 다르면 이단시 하고 적대시하고 같은 그리스도인끼리 이방인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또한 허락하시는것 같다.

허락하는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것은 그렇게 자기들만의 리그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것이다.

그 역사함만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못을 하더라도, 그 가운데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므로 어지러운 세상가운데 어지러운 조직가운데, 어지러운 교회가운데도 구원받는 이들을 더하는 이들이 역사상 그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방안에서 노느것도 재밌다.

그것도 열매가 있으으로 기쁜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들의 세계관대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거실에 나와서 함께 하나님의 세계를 경영해 나가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기들의 생각과 가치관가 맞지 않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또한 자기들끼리 세계를 만들면 잘 만들 수 있지만, 여러 가치관이 다른 이들과 만들려면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실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러분야의 여러곳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다.


혹,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우리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이제는 자기방에서 나와서 거실에서 더욱 더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것이 어떻겠는가?


그리스도인

고립되면, 부패한다.

나와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해야한다.

물론, 본질적인 중요한 것들은 타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은 너그러이 서로를 받아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최근 명성교회 세습문제로 교회 안팎이 시끄러운것 같다.
오죽했으면 JTBC에서 여러차례 이 내용을 다루었을까?

정말 교회의 세습이 문제인가?
성경적으로 교회의 세습이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얘기해주는 사람을 잘 보지 못한것 같다.

성경은 과연 세습에 대해서 문제라고 얘기할까?
먼저 '세습'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를 좀 살펴봐야 할것 같다.

세습 : 한 집안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

국어사전에는 '세습'에 대한 범위가 한 집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명성교회측에서는 '세습'이라는 용어가 아닌 '계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달라고 주장한다.
그럼 계승은 어떤것인지 살펴보자.

계승
조상 전통이나 문화유산, 업적 따위를 물려받아 이어 나감. [비슷한 말] 수계10().
선임자 를 이어받음. [비슷한 말] 승계2() ㆍ승사4().

계승은 범위가 '가족','조상'도 되지만 가족과 상관없는 관계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명성교회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계승'이라고 표현해도 틀린말은 아닌것 같다.

세습이었든 계승이었든 그 용어가 중요한것 같지는 않다.
분명한건, 성경에서 교회의 목회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목회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어도 된다,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어떠한 구절도 없다.
단지 찾아볼 수 있다면..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교회를 잘 목회할 것을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기타 서신서에도 '바울'이 교회의 인도자들을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목회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다양한 측면에서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봤을때, 목회를 세습,계승 하는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이렇게 엄중하고도 어려운 일을 본인들이 아버지를 뒤이어 한다는데 칭찬하는것이 당연한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들일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고 담임목사가 된 것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장로들이 된것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교회의 리더십들이 가지고 있는것 아닐까?

교회의 주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다스려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것을 잃어버린 교회는
담임목사나 목사,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것이 성경적인 것이지만, 그 다스림은 항상 주님의 복종아래 있는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문제인가?
그렇다면 작은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는 대형교회도 아니며, 작은교회가 잘하는것도 아니다.
어떠한 교회든지, 그 교회의 주인이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가 아닐때 발생한다.

교회가 주님의 뜻에 굴복하고 인도되기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명예를 좇아갈때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모든 교회는 타락할 수 있다.

이미 깊이 타락한 교회는 회개의 기회가 영영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주님은 계속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타락한 교회들이 회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 넘쳐나는 로마카톨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명성교회 세습 반대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한번 타락한 교회가 다시 회복되기는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명성교회는 교단을 탈퇴하고서라도 자기들의 길을 갈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항상 그런식으로 일한다.

내 자신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더 이상 귀울이지 않는다면
그때보다 사탄이 일하기 쉬울때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듣지만, 누구나 넘어져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경계는 내가 믿고 있는 형제들의 권면을 듣지 않을때... 그때는 위험한 때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것만 옳다라고 생각이 들때 그때는 위험하다.
그때는 성경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기존에 자신과 교류했던 경건한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자신의 상태를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명성교회 문제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성장해가고 있는지,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한것 같다.
우리 주위에서 성경적으로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고 주님의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진다.


오...주님께서 마지막 이때에 경건한 자들을 많이 일으켜주시기를 간구한다.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얻게 된 것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바치면서까지 이러한 교회를 존재하게 하였는가?

이는 피조물인 사람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창조주인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수준과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하실때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자 은혜일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들을 한다.
교회의 대부분의 행사나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듯하다.

그런데, 교회의 존재론적인 이유를 생각해보고 성경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면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거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실천이었고 앞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것을 행하신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때 진정한 만족과 평안과 감사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몸된 교회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놀라운 지체로 삼아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복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행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영원토록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전혀 없으시기에 교회를 존재하게 할 이유가 없으셨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지위를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이 사실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인식할때,
그때가 사실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복이 임하는 순간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
그 교회의 존재 목적을 우리가 진심으로 알게 될때, 그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함께 지체로 지음받은 우리도 동일하게 받게 된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몸된 지체이므로 그 영광을 함께 받아 누리게 된다.

영광스러운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받으셔야만, 우리에게도 복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존재케 하신 이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놀라운 영광이 되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이다.

에베소서 5: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중요함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교회란 무엇이죠?'라고 질문한다면 명확히 이해하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본인이 말한것에 대해서 실천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그냥 우연히 교회에서 하나님을 알게되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에 다니다보니 사람들과 사귀게 되어서 그들과 친분도 쌓고,
또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일들도 하게되고 직분도 맡게 되면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이제는 그러한 생활이 익숙해져서 삶의 중요한 패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본질적인 질문에 대하여 해보아야 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들었고 배웠던것 말고, 본인이 소화해 낸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이 어려움에 빠지거나 교회에서 상처받거나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보게 되는 시기에 '교회 다닐필요 있어?'
라고 말하면서 나홀로 신자가 되거나,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채 살아가는 안타까운 삶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교회란 무엇인가?
아..쉬운것 같지만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싶다.

인생이 무엇인가?
왜 사는가?

쉬운것 같지만 어려운 질문들..그러나 인생에서 이러한 고민을 깊이 하지 않으면 남들과 똑같이 흘러가는대로 살아갈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고민해야 하고, 그 고민의 심층부에서는 성경과, 기도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운데 얻은 대답들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좀 멀리 왔지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교회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들을 엮어가야 할까?
대부분의 전문적인 책들은 서론은 그 분야에 대한 '역사'로 부터 시작된다.
그러기에 이 질문도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로부터 시작하는것이 어떨까 한다.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사도행전에 나오듯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교회가 시작되었나?
분명 맞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때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가 나타나기까지는 계획이 있어야 했고, 교회가 세상에 소개되기까지 구체적인 실행들이 있어왔었다.

그 계획과 실행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찾아봐야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첫 개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교회를 생각하고 계획했던 분께로 가까이 가보자.

인류를 만들기 전,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그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생각하셨는가?
그렇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그 때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생각하셨던 것이고 이 '교회'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셨던 것이다.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교회가 시작되고 얻어지는 과정에서의 실천들은 하나님이 최초 계획하셨던 실행방안에서 바뀌었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건 인간이 범죄를 하였든, 범죄를 하지 않았든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에 대한 분명한 계획이 있으셨고, 이 교회를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셔던 것이다.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사랑도 완전하셔서 아무런 다른것도 필요치 않으셨는데, 갑자기 왜 이런 계획을 하신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다라는 명제로 시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셔서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충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넘쳐 넘쳐 흘러서 자신의 사랑을 나누기에 가장 적합하고도 완전한 어떠한 것을 더 창조하시길 원하셨던 것 같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셨나?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지혜로 다 알 순 없지만, 성경전반에 흐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았을때,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셔서 이 교회를 만들기를 원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영원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더욱 넘치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 대한 계획을 하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천지를 만드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교회'를 알려주시고 이 사람들이 '교회'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하나님 수준으로 알기를 원하셨고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면 '교회의 성도들, 사역들, 건물, 등등'이 있다. 그런것들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계획하시고 만드신 주인이신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얘기하면 그 대부분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계획하시고 만드신 설계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적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지만 교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얘기들을 하는걸 보면 대부분, 아니 100%가 사람에 대한 실망, 상처 들이다.
하나님께 상처받았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사실상 없는것 같다.
그런데 실제 교회에 대해서 얘기할때는, 이 사람들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대화속에는 하나님은 없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교회'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잡히지 않아서 그런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교회의 시작.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실천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계획한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편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면을 계속적으로 넓혀 가야 할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1~12절.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교회의 사역자는 가난해야 하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사역자이다.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사역자는 full-time 사역자들을 얘기하고자 한다. 목사, 선교사 등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의 양떼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린 이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교회의 사역자가 가져야 하는 '이미지'나 '덕목'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롤 모델로써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고자 하는바와 일치하는지 우리는 항상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목사,선교사는 가난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선교지에 있을때 재미난 일이 하나 있었다. 선교사들이 차를 살때 한국교회 성도들을 배려해서(?) 또는 의식해서(?) 차의 브랜드에 대해서 고민해서 사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벤츠가 가장 저렴하였다. 저렴한 벤츠는 100~200만원으로 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차를 사면 수리비때문에 더 고생한다. 그리고 아우디, 혼다, 토요타 등 일본차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차도 있었지만, 부품구하기가 어렵고 내구성도 일본차에 비하여 좋지 못하였기에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주로 일본차인 혼다나 토요타를 많이 선호했다. 선호하는 이유중에는 일본차가 확실히 내구성이 좋았고 여러가지로 장점이 많았었다. 선교지마다 차들의 종류가 다르겠지만 내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토요타나 혼다가 주로 선호되는 브랜드였다. 그런데 선교사들중에 벤츠나 아우디를 타고 다니는 선교사들은 못본것 같다. 벤츠는 분명 좋은차였으나, 벤츠를 타고 다닌다고 하면 한국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난건 벤츠나 토요타나 가격에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년식이 오래된건 벤츠가 훨씬 저렴한것도 많았다. 벤츠가 더 저렴하더라도 벤츠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선교사들은 한국성도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사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국내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오죽할까? 얼마나 더욱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성도들은 만족하는것일까? 이는 성경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사들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고, 또 한편으로 잘못된 사역자에 대한 '이미지'를 사역자들에게 강요하는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1,12절 말씀에 보니 사도바울이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 그리고 본인이 어떠한 형편에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으로 사역자는 이렇게 살아야한다라고 결론지을 순 없겠지만, 어느정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성경의 관점들은 있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11절 서두에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분명 사도바울은 이 글을 쓸때는 궁핍하지 않았던것 같다. 그러면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사도바울은 기록한다. 이 말은 사도바울은 가난할때도 있었고, 부할때도 있었다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본인이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12절에 구체적으로 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비천에 처했었다. 그리고 풍부에 처하기도 했었다. 배부른적도 있었고, 배고픈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가난한적도 있었고, 부한적도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건 그가 가난하고 부한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풍부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가장 부요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 부요한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셨고, 모든 배고픔과 어려움을 친히 경험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때 가난하게만 지내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원래 그분은 부요하신 분이시다. 단지 그 부요함을 이땅에 살때 잠시 버리신것 뿐이다.

자. 다시 원질문으로 돌아와서 사역자는 가난해야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사역자는 가난할수도 있고 부할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가난에 처하든지 부에 처하든지 그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주님 안에서 마음을 굳건히 하는 자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역자는 가난해야 한다라고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그것을 사역자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에 대해서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역자들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를 본인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괜한 고생을 하게 된다.
사역자는 부해야 한다라고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어떨까? 이 또한 문제가 있다. 성경은 사역자는 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렇게 가르쳐 진다면 교회내의 가난한 이들이 힘겨워할 수도 있다.

사역자는 가난과 부, 그 어떠한 것에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 가난해 지는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부해지는것 또한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더욱 어려운건, 가난하든, 부하든 그러한것에서 자유로워지는것 이것이다.
이것은 실로 간단하지 않다. 성경은 항상 '돈'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데 그 '경계'의 근본 가르침은 '돈'을 가지지 말것이 아니라, '돈'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이다.

교회의 사역자는 분명 '돈'에 대해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그 자유로움이 반드시 가난해야 하는것도, 부해서는 안되는것도 아니다. 때로는 부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가난해 질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그 환경을 보지 않고 주님 주신 환경으로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라 여겨진다.

성경이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면, 먼저는 사역자들도 당당하게 이러한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고, 성도들도 이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들이 있다면 버려야 할 것이다.
 

 

"예배"

이것보다 기쁘고 이것보다 무거운 주제가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예배를 다른교회들과 비교하여 조금 더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고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많은 예배에 대한 기준점이 있겠지만, 오늘은 이사야서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잠깐 이사야서의 배경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상징하는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시점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남유다도 곧 멸망당하게 되고 포로생활을 할것을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한다.
이사야서 1,2장에서 1장은 북이스라엘의 죄악들, 그리고 2장은 남유다의 죄악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죄악들의 주된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때 이사야서를 먼저 살펴보는것이 우리를 살펴보는데 가장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우리를 살펴보는데 가장 좋은 거울이기때문이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부르며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에 누가 너희 손에서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단지 내 뜰을 밟을 뿐이니라.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
 (이사야 1장 11~14절, 한글킹제임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모든일들을 주관하신다.
북이스라엘의 타락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교훈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먼저 이미 타락하여 망해가고 있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하여 경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까지는 남유다 백성들은 자신들도 망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았고, 결국 예언대로 남유다도 망하게 된다.
중요한건, 망하기 전에 하나님은 계속 경고하시고 남유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계신다.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타락하였는지는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정에 잘 나와있다.
북이스라엘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건, 13절 끝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참으로 두려워진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견지지 못하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불법이라고 한다.
그들의 예배의 형태는 분명 엄숙하였던것 같다. 사람들이 보기에 거룩해보였다. 그러니 하나님도 '엄숙한 모임'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14절에는 그들이 정한 거룩한 절기들 그것이 하나님께는 괴로움이고, 그것을 감당하기에 하나님이 지쳤다라고까지 표현한다.
피곤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여기에서는 지쳤다라고 하시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괴로움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표현인가...

이제는 남유다의 예배를 살펴보자.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그들의 땅에는 또한 은과 금이 가득하여 그들의 보물은 끝이 없고 그들의 땅에는 또한 말이 가득하여 그들의 병거가 끝이 없으며
 그들의 땅에는 또한 우상이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 즉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게 경배하고
 천한 자도 절하며 큰 자도 굴복하니 그러므로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사야 2장 6~9절)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예배도 받지 않으셨다. 그 평가에는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이 많았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우상'에게 경배한다고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것 같았고, 그들의 중심에도 하나님을 섬기는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들 자신을 섬기고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를 위해 경배하려고 만든 자기의 은 우상들과 자기의 금 우상들을 두더지와 박쥐들에게 던질 것이요,
 또 주께서 일어나사 무섭게 땅을 흔드실 때에 그분의 두려움과 그분의 위엄의 영광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바위틈과 험악한 바위 꼭대기로 들어가리라.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숨은 그의 콧구멍에 있나니 어떤 점에서 그를 수에 넣어야 하겠느냐?"
(이사야 2장 20~22절)

결국, 하나님은 다시금 엄위하게 그들을 심판하시고 주께서 그들의 우상들을 모두 헛된것으로 만들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남유다 백성도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자신들을 위해 만든 모든 우상들을 던져버리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2절에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다.
남유다백성들도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의지했었다.
눈에 보이는 쉬운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지만 실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
눈에 보여서 쉽게 의지할 수 있는 우상들과 사람들을 의지했던 것이 남유다 백성들의 죄악이었다.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예배는 '로마 카톨릭'의 타락한 예배일까?
그리고 우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로마 카톨릭'이 드리는 타락한 예배가 아닌 '개신교'에 속하여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것일까?
아니면 우리들 중 아주 소수는 '개신교'의 타락한 예배에서 벗어나서 소수의 거룩한 무리들로 모여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무리일까?
아니면 우리들 중 일부는 그 소수의 거룩한 무리들도 타락하였다고 생각하고 '나홀로' 예배나 또 다른 '거룩한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무리일까?

우리가 어디에 속했든, 그 공동체가 우리의 예배의 거룩함을 보장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 공동체의 예배 형태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사야서의 1,2장은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예배, 그리고 남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은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배 또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는 없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결국 예수님을 보내셔서 다시금 거룩한 예배를 회복하셨다.

그러나 역사는 흘러 흘러 또 다시 우리는 북이스라엘의 예배의 모습을, 또는 남유다의 예배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여 점검해볼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만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 답을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자,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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