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얻게 된 것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바치면서까지 이러한 교회를 존재하게 하였는가?

이는 피조물인 사람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창조주인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수준과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하실때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자 은혜일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들을 한다.
교회의 대부분의 행사나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듯하다.

그런데, 교회의 존재론적인 이유를 생각해보고 성경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면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거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실천이었고 앞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것을 행하신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때 진정한 만족과 평안과 감사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몸된 교회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놀라운 지체로 삼아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복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행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영원토록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전혀 없으시기에 교회를 존재하게 할 이유가 없으셨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지위를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이 사실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인식할때,
그때가 사실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복이 임하는 순간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
그 교회의 존재 목적을 우리가 진심으로 알게 될때, 그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함께 지체로 지음받은 우리도 동일하게 받게 된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몸된 지체이므로 그 영광을 함께 받아 누리게 된다.

영광스러운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받으셔야만, 우리에게도 복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존재케 하신 이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놀라운 영광이 되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이다.

에베소서 5: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중요함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교회란 무엇이죠?'라고 질문한다면 명확히 이해하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본인이 말한것에 대해서 실천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그냥 우연히 교회에서 하나님을 알게되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에 다니다보니 사람들과 사귀게 되어서 그들과 친분도 쌓고,
또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일들도 하게되고 직분도 맡게 되면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이제는 그러한 생활이 익숙해져서 삶의 중요한 패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본질적인 질문에 대하여 해보아야 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들었고 배웠던것 말고, 본인이 소화해 낸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이 어려움에 빠지거나 교회에서 상처받거나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보게 되는 시기에 '교회 다닐필요 있어?'
라고 말하면서 나홀로 신자가 되거나,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채 살아가는 안타까운 삶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교회란 무엇인가?
아..쉬운것 같지만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싶다.

인생이 무엇인가?
왜 사는가?

쉬운것 같지만 어려운 질문들..그러나 인생에서 이러한 고민을 깊이 하지 않으면 남들과 똑같이 흘러가는대로 살아갈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고민해야 하고, 그 고민의 심층부에서는 성경과, 기도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운데 얻은 대답들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좀 멀리 왔지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교회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들을 엮어가야 할까?
대부분의 전문적인 책들은 서론은 그 분야에 대한 '역사'로 부터 시작된다.
그러기에 이 질문도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로부터 시작하는것이 어떨까 한다.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사도행전에 나오듯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교회가 시작되었나?
분명 맞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때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가 나타나기까지는 계획이 있어야 했고, 교회가 세상에 소개되기까지 구체적인 실행들이 있어왔었다.

그 계획과 실행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찾아봐야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첫 개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교회를 생각하고 계획했던 분께로 가까이 가보자.

인류를 만들기 전,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그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생각하셨는가?
그렇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그 때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생각하셨던 것이고 이 '교회'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셨던 것이다.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교회가 시작되고 얻어지는 과정에서의 실천들은 하나님이 최초 계획하셨던 실행방안에서 바뀌었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건 인간이 범죄를 하였든, 범죄를 하지 않았든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에 대한 분명한 계획이 있으셨고, 이 교회를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셔던 것이다.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사랑도 완전하셔서 아무런 다른것도 필요치 않으셨는데, 갑자기 왜 이런 계획을 하신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다라는 명제로 시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셔서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충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넘쳐 넘쳐 흘러서 자신의 사랑을 나누기에 가장 적합하고도 완전한 어떠한 것을 더 창조하시길 원하셨던 것 같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셨나?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지혜로 다 알 순 없지만, 성경전반에 흐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았을때,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셔서 이 교회를 만들기를 원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영원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더욱 넘치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 대한 계획을 하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천지를 만드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교회'를 알려주시고 이 사람들이 '교회'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하나님 수준으로 알기를 원하셨고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면 '교회의 성도들, 사역들, 건물, 등등'이 있다. 그런것들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계획하시고 만드신 주인이신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얘기하면 그 대부분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계획하시고 만드신 설계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적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지만 교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얘기들을 하는걸 보면 대부분, 아니 100%가 사람에 대한 실망, 상처 들이다.
하나님께 상처받았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사실상 없는것 같다.
그런데 실제 교회에 대해서 얘기할때는, 이 사람들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대화속에는 하나님은 없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교회'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잡히지 않아서 그런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교회의 시작.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실천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계획한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편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면을 계속적으로 넓혀 가야 할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1~12절.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교회의 사역자는 가난해야 하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사역자이다.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사역자는 full-time 사역자들을 얘기하고자 한다. 목사, 선교사 등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의 양떼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린 이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교회의 사역자가 가져야 하는 '이미지'나 '덕목'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롤 모델로써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고자 하는바와 일치하는지 우리는 항상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목사,선교사는 가난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선교지에 있을때 재미난 일이 하나 있었다. 선교사들이 차를 살때 한국교회 성도들을 배려해서(?) 또는 의식해서(?) 차의 브랜드에 대해서 고민해서 사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벤츠가 가장 저렴하였다. 저렴한 벤츠는 100~200만원으로 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차를 사면 수리비때문에 더 고생한다. 그리고 아우디, 혼다, 토요타 등 일본차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차도 있었지만, 부품구하기가 어렵고 내구성도 일본차에 비하여 좋지 못하였기에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주로 일본차인 혼다나 토요타를 많이 선호했다. 선호하는 이유중에는 일본차가 확실히 내구성이 좋았고 여러가지로 장점이 많았었다. 선교지마다 차들의 종류가 다르겠지만 내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토요타나 혼다가 주로 선호되는 브랜드였다. 그런데 선교사들중에 벤츠나 아우디를 타고 다니는 선교사들은 못본것 같다. 벤츠는 분명 좋은차였으나, 벤츠를 타고 다닌다고 하면 한국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난건 벤츠나 토요타나 가격에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년식이 오래된건 벤츠가 훨씬 저렴한것도 많았다. 벤츠가 더 저렴하더라도 벤츠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선교사들은 한국성도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사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국내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오죽할까? 얼마나 더욱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성도들은 만족하는것일까? 이는 성경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사들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고, 또 한편으로 잘못된 사역자에 대한 '이미지'를 사역자들에게 강요하는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1,12절 말씀에 보니 사도바울이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 그리고 본인이 어떠한 형편에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으로 사역자는 이렇게 살아야한다라고 결론지을 순 없겠지만, 어느정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성경의 관점들은 있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11절 서두에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분명 사도바울은 이 글을 쓸때는 궁핍하지 않았던것 같다. 그러면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사도바울은 기록한다. 이 말은 사도바울은 가난할때도 있었고, 부할때도 있었다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본인이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12절에 구체적으로 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비천에 처했었다. 그리고 풍부에 처하기도 했었다. 배부른적도 있었고, 배고픈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가난한적도 있었고, 부한적도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건 그가 가난하고 부한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풍부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가장 부요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 부요한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셨고, 모든 배고픔과 어려움을 친히 경험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때 가난하게만 지내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원래 그분은 부요하신 분이시다. 단지 그 부요함을 이땅에 살때 잠시 버리신것 뿐이다.

자. 다시 원질문으로 돌아와서 사역자는 가난해야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사역자는 가난할수도 있고 부할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가난에 처하든지 부에 처하든지 그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주님 안에서 마음을 굳건히 하는 자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역자는 가난해야 한다라고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그것을 사역자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에 대해서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역자들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를 본인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괜한 고생을 하게 된다.
사역자는 부해야 한다라고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어떨까? 이 또한 문제가 있다. 성경은 사역자는 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렇게 가르쳐 진다면 교회내의 가난한 이들이 힘겨워할 수도 있다.

사역자는 가난과 부, 그 어떠한 것에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 가난해 지는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부해지는것 또한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더욱 어려운건, 가난하든, 부하든 그러한것에서 자유로워지는것 이것이다.
이것은 실로 간단하지 않다. 성경은 항상 '돈'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데 그 '경계'의 근본 가르침은 '돈'을 가지지 말것이 아니라, '돈'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이다.

교회의 사역자는 분명 '돈'에 대해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그 자유로움이 반드시 가난해야 하는것도, 부해서는 안되는것도 아니다. 때로는 부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가난해 질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그 환경을 보지 않고 주님 주신 환경으로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라 여겨진다.

성경이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면, 먼저는 사역자들도 당당하게 이러한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고, 성도들도 이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들이 있다면 버려야 할 것이다.
 

 

"예배"

이것보다 기쁘고 이것보다 무거운 주제가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예배를 다른교회들과 비교하여 조금 더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고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많은 예배에 대한 기준점이 있겠지만, 오늘은 이사야서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잠깐 이사야서의 배경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상징하는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시점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남유다도 곧 멸망당하게 되고 포로생활을 할것을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한다.
이사야서 1,2장에서 1장은 북이스라엘의 죄악들, 그리고 2장은 남유다의 죄악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죄악들의 주된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때 이사야서를 먼저 살펴보는것이 우리를 살펴보는데 가장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우리를 살펴보는데 가장 좋은 거울이기때문이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부르며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에 누가 너희 손에서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단지 내 뜰을 밟을 뿐이니라.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
 (이사야 1장 11~14절, 한글킹제임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모든일들을 주관하신다.
북이스라엘의 타락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교훈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먼저 이미 타락하여 망해가고 있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하여 경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까지는 남유다 백성들은 자신들도 망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았고, 결국 예언대로 남유다도 망하게 된다.
중요한건, 망하기 전에 하나님은 계속 경고하시고 남유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계신다.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타락하였는지는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정에 잘 나와있다.
북이스라엘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건, 13절 끝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참으로 두려워진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견지지 못하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불법이라고 한다.
그들의 예배의 형태는 분명 엄숙하였던것 같다. 사람들이 보기에 거룩해보였다. 그러니 하나님도 '엄숙한 모임'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14절에는 그들이 정한 거룩한 절기들 그것이 하나님께는 괴로움이고, 그것을 감당하기에 하나님이 지쳤다라고까지 표현한다.
피곤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여기에서는 지쳤다라고 하시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괴로움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표현인가...

이제는 남유다의 예배를 살펴보자.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그들의 땅에는 또한 은과 금이 가득하여 그들의 보물은 끝이 없고 그들의 땅에는 또한 말이 가득하여 그들의 병거가 끝이 없으며
 그들의 땅에는 또한 우상이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 즉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게 경배하고
 천한 자도 절하며 큰 자도 굴복하니 그러므로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사야 2장 6~9절)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예배도 받지 않으셨다. 그 평가에는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이 많았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우상'에게 경배한다고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것 같았고, 그들의 중심에도 하나님을 섬기는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들 자신을 섬기고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를 위해 경배하려고 만든 자기의 은 우상들과 자기의 금 우상들을 두더지와 박쥐들에게 던질 것이요,
 또 주께서 일어나사 무섭게 땅을 흔드실 때에 그분의 두려움과 그분의 위엄의 영광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바위틈과 험악한 바위 꼭대기로 들어가리라.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숨은 그의 콧구멍에 있나니 어떤 점에서 그를 수에 넣어야 하겠느냐?"
(이사야 2장 20~22절)

결국, 하나님은 다시금 엄위하게 그들을 심판하시고 주께서 그들의 우상들을 모두 헛된것으로 만들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남유다 백성도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자신들을 위해 만든 모든 우상들을 던져버리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2절에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다.
남유다백성들도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의지했었다.
눈에 보이는 쉬운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지만 실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
눈에 보여서 쉽게 의지할 수 있는 우상들과 사람들을 의지했던 것이 남유다 백성들의 죄악이었다.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예배는 '로마 카톨릭'의 타락한 예배일까?
그리고 우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로마 카톨릭'이 드리는 타락한 예배가 아닌 '개신교'에 속하여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것일까?
아니면 우리들 중 아주 소수는 '개신교'의 타락한 예배에서 벗어나서 소수의 거룩한 무리들로 모여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무리일까?
아니면 우리들 중 일부는 그 소수의 거룩한 무리들도 타락하였다고 생각하고 '나홀로' 예배나 또 다른 '거룩한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무리일까?

우리가 어디에 속했든, 그 공동체가 우리의 예배의 거룩함을 보장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 공동체의 예배 형태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사야서의 1,2장은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예배, 그리고 남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은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배 또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는 없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결국 예수님을 보내셔서 다시금 거룩한 예배를 회복하셨다.

그러나 역사는 흘러 흘러 또 다시 우리는 북이스라엘의 예배의 모습을, 또는 남유다의 예배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여 점검해볼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만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 답을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자,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기독교 강요(하) 제 9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중 12. 맹종은 불가하다 

 현대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할 만한 도움을 이성에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최후의 가련한 도피 수단을 사용한다. 즉 이 사람들 자신은, 비록 그 마음과 생각이 둔하고 심정과 의지가 철저하게 악할지라도 인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히 13:17) 주의 말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사실 이런 자들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내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여호수아보다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주의 선지자요 훌륭한 목자였던 여호수아를 주께서 그 직책에 임명하실 때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들어 보자. "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8,7). 그러므로 주의 율법에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자들의 교훈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경계하라고 주께서 자주 경고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한 요한의 충고도 헛것이 될 것이다(요일 4:1). 천사들도 이 비판을 면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탄과 그 거짓말은 오죽할까(갈1:8)?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신 말씀은(마15:14)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어떤 목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가 하는 것과, 무분별하게 모든 목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칭호에 놀라며 우리까지도 끌려가서 그들과 같은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름으로 가장했든간에 다른사람들의 잘못에 끌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특히 경고하신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이 해답이 옳다면, 대제사장이든 대주교든 교황이든 그 누구이든간에 눈 먼 인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과 함께 같은 벼랑에서 떨어지게 할 뿐이다. 따라서 이름이 회의나 목자나 주교라고 해서(그 가운데는 진정한 이름과 가짜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과 행동을 증거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의 영을 검토하며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기독교 강요 하, 30page 16. 완전을 자칭함은 그릇된 의견의 결과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착한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지만, 이런 신경 과민은 진정한 거룩과 거룩에 대한 진정한 열성에서 생기기보다는 자만심과 교만 그리고 거룩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서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대담하게 교회 탈퇴를 선동하며 기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모든 사람을 경멸하며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 외의 별다른 이유가 없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고 적절하게 말했다. "교회의 규율을 경건하게 유지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에(엡 4:3)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 상호 관용의 교훈을 지키라고 사도는 명령했다. 지키지 않는다면 그 시정책으로 처벌을 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며 따라서 시정책이 아니다. 이 악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미워한다기보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거나 적어도 분열시키려고 한다. 자만심에 부풀고 미친듯이 완고하며 거짓말로 중상하고 음모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 악한 무리는 강직, 엄격한 체해서 그들에게 진리의 광명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게 한다.

성경은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되, 더욱 온유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며 성실한 사랑과 평화로운 단결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이 원칙을 모독적인 분파 행위로 더럽히며, 형제들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삼는다. " 그러나 어거스틴은 경건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하게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끈기 있게 참으며 사랑으로 애통하라. 하나님께서 시정하시거나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며 쭉정이를 키질하실 때까지 기다리라" (마 13:40, 3:12, 눅 3:17)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이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차고 용감하게 의를 옹호하는 듯하면서도 유일한 의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이 눈에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악인들이 밉다고 해서 이 공동체의 표지를 깨뜨리는 사람은 성도의 교통에서 탈락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큰 무리 가운데 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거룩하며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 그들은 병든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과오를 결코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주를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삼 분발하며 더 고결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지극히 성결한 사람도 심히 유감스러운 과오를 범하는 때가 있으므로 사람을 한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며 신성한 신비에 참가하는 것은 이 모든 권능이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허비될 가능성보다 교회의 집회를 위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끝으로,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선한 양심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1:5)

믿음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1:19)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다.
바울은 주님의 종이었고, 나이가 어린 디모데에게 주님의 일꾼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사랑을 담아서 편지를 썼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꾼들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성경은 일꾼의 자질중에 이 선한양심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것 같다.
그래서 딤전 1:19절에는 이 양심을 버린이들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고 까지 한다.

양심을 버린것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
정말인가?
성경은 그렇다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양심에 민감한가?
성령께서 우리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히 들리는가?

처음 무엇인가 잘못된 일을 했을때 우리의 양심이 제일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그때 어떠한 이유로 그 양심의 반응을 덮어 버리게 된다. 그러한 일을 반복하게 되면 그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양심이 무뎌지고 양심의 반응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때로는 대의라는 명분 아래 우리의 양심을 속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계속 반복하게 되면 결국에 우리의 양심을 버리는 일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청결한가?
나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착한 양심을 소유한 주님의 일꾼인가?

서머나 교회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 겉으로 보여지기에 서머나 교회는 환난가운데 있었고 궁핍함 가운데 있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도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으며 다른 이들도 그렇게 봤을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를 부요하게 보신다. 하나님은 항상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은 무엇인가? 실제 그들은 서머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었다. 
- 겉보기에 유대인이었고, 겉보기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었고, 유전적으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 문제는 그들 스스로는 너무나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까지 단언하신다.
- 스스로 나를 보는 관점은 언제나 실제와 다를 가능성이 넘쳐난다. 중요한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의 평가도 아닌 하나님의 평가다.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실제로 순교에 이르렀다.
 - 성경은 십일 동안 환난을 받는다고 기록되어있다.
 - 우리에게 닥친 환난은 그렇게 길지 않다. 그 기간을 충성할때 하나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선물로 주신다.
 - 때로는 고난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두려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친히 나에게 주실 선물은 나로 하여금 짧은 고난의 시간을 넘어서게 한다.
 - 물론 우리가 느끼기에 그 고난은 너무나 길어 보인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그 기간은 짧았고, 그 기간은 하나님을 더욱 알게되는 시간이고, 더욱 하나님과 친밀해 질 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곳곳에 서마나 교회와 같은 실상이 부요한 교회들을 많이 두셨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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