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창세기 1장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누가 뭐라고 하든, 성경은 해와 달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해와 달을 창조하신 이유를 창세기 1장 16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태양은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한다.'는 분명한 사명감을 태양과 달에게 주셨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빛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매일 새로운 하루가 주어질때 단 '하루'만이라도 태양이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까?

 

 상상해본다면 일단 모든 사람들이 굉장히 두려움을 느낄것 같다.

 그것이 사람들의 첫 반응이라 생각이 든다.

 

 밤에 비취는 달은 어떤가?

 밤에 달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더 이상 밤에 달을 필요로 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분명 낮에 비하여 밤에 달은 우리에게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달이 사라져서는 안되겠지만, 최소한 현대인의 삶에 달이 주는 영향은 과거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작은 광명체인 달이 밤을 주관한다고 이야기 한다.

 인류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달이 밤을 주관할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주변의 밝은 조명들로 인하여, 보름달이 이전 과거에 비하여 밝게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별들도 이제는 더 이상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인류 문명의 결과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밤의 아름다운 조명들이 하늘의 달과 빛의 밝음을 어둡게 만든것이다.

 그래도 달과 별들의 빛을 없애지는 못하는것 같다.

 

 사람들은 추석을 맞이하여 보름달을 보면서 무엇인가 여전히 소원을 빌기도 한다.

 지성과 이성이 넘치는 시대에, 그리고 과학의 놀라운 발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것일까?

 '달'이 아무런 능력이 없고 무엇인가 실제로 도와줄 수 없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도데체 

 "왜?"

 

  아마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밤을 주관하게끔 하는 그 능력을 거부하지 못하는것 아닐까?

 달에게서 느껴지는 위엄을 어찌하지 못하는것 아닐까?

 

 진리를 아는자들은

 달의 비밀과 해의 비밀을 알고 있다.

 

 달과 해를 통해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1년에 한번 있는 추석.

 평소에는 잘 보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날만큼은 가족들과 모여서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소원을 빌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감성에 젖어들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기에 자유롭게 우리는 이런 저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달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참 뜻을 알고자 하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아니, 그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사실 타락한 죄인들의 본성이지만,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준 것 또한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추석을 맞이하여..

 보름달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창세기에 기록된

 밤을 주관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주제별 성경연구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을 주신 이유  (0) 2019.09.13
진정한 쉼이란  (0) 2019.07.29
정체성이 흔들릴때  (0) 2019.05.30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  (0) 2019.04.22
실존하는 죽음 앞에 선 인생  (0) 2019.01.24
희망을 먹고 사는 인생  (0) 2019.01.24

여러분의 삶의 짐의 무게는 어떤가요?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나라

 

휴가시즌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바캉스'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놀고, 먹고, 즐기고 등등이 떠오른다.

아니면, 이곳저곳 많은곳을 다니는 그러한 여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캉스(vacance) 말의 어원은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인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또는 "비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도 많은 변화로 인하여 이러한 비움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너무 삶이 고되고 힘들어 모든것을 내려놓고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이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속에서 볼 수 있는듯 하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비울때 다시금 채워지는걸 경험하는 문화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참된 쉼, 휴가란 무엇일까?

 

우리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모든 인생은 각자 나름의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니고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는 말씀이다.

 

28절보다 중요한 말씀은 29절인데,

이유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실 수 있는지와 어떤 쉼을 줄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29절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29절 마지막에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우리 삶의 여러가지 문제들, 어려운 점들, 짐들의 원인을 곰곰히 따져보면,

대부분 걱정과 염려, 근심등 마음의 문제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초조함으로 인하여 현재를 잘 살지 못하는 현상들.

그리고 현재의 괴로움이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들.

다양한 문제와 어려움의 대부분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쉼은 우리의 환경이 나아지거나,

삶의 불편한것들이 해소되고 더 나은 삶이 되는것이 아니다.

분명 우리의 삶의 배경, 환경들은 이전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다.

주변의 환경들, 나의 일의 성취 등 많은것들이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할지라도 나의 마음은 괴로울 수 있다.

많은것들이 이전보다 더 나빠지고 있더라도 나의 마음은 기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어떻게 기뻐하고 평안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쁨과 평안 가운데 계신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본인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배우게 될때, 우리도 진정한 쉼을 얻고 누릴수 있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울때 우리 삶은 항상 휴가처럼 쉼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의 멍에를 주신다고 하셨다.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멍에' 를 잘 메고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게 될때,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멍에의 특징 중

첫번째는 쉽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가볍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감당하고 짊어지고 있는 짐이 혹시 무겁고 어려운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멍에가 아닌 나만의 멍에나, 다른 욕심의 멍에를 메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주제별 성경연구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을 주신 이유  (0) 2019.09.13
진정한 쉼이란  (0) 2019.07.29
정체성이 흔들릴때  (0) 2019.05.30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  (0) 2019.04.22
실존하는 죽음 앞에 선 인생  (0) 2019.01.24
희망을 먹고 사는 인생  (0) 2019.01.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1:21~22)

 

 

 모든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큰것보다는 안전하고 미래가 보장된 삶을 원한다. 그래서 안전한 직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등을 원한다. 경제적으로 안전한것처럼 보이는것이 나의 미래의 삶도 보장해 줄것이라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위의 반응과 그동안의 경험이 그것을 지지해 주는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실이다. 가끔 변수가 생길때도 있지만 분명히 경제적 안정이 우리의 삶을 조금 평탄하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한가지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경제적 안정, 안정된 직장, 안정된 삶이 우리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마태복음 21:21절 말씀은 전혀 적용하기 힘든 말씀으로 보여진다. 우리 삶에 산을 바다에 옮길 필요도 없으며 그러한 일은 정말이지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날 수도 없을것 같은 우리의 경험적 믿음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 믿음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믿음의 수준을 가지고 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실천하고 믿음을 배우려고 애쓴 흔적을 애초부터 없애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안정적인 직장, 우리의 안정적인 미래, 우리가 만들어 놓은 여러가지 안전장치들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시스템이 주는 안정적인 장치들을 더 신뢰하려고 노력하는건 아닐까?

 

믿음의 삶에 있어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큰것이 더 믿음을 배우고 실천하기에 좋은 환경적 요소라고 생각이 된다. 구지 노력해서 안정적인 환경을 없애면서까지 삶을 불확실성으로 몰아갈 필요까지는 없을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사회시스템이나 다양한 안정적인 장치들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불안감을 없애려는 목적이 크다면, 이건 한번 깊이 고민해보고 하나님과 단둘이 얘기해봐야 할 영역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왔지만,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잘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믿음의 역량, 믿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우리를 좀 더 불확실성이 큰 환경으로 몰아가는 적극적인 태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불확실성이 큰 환경이 우리 앞에 다가올때 분명한것은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고 경험하기에는 더더욱 좋은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확실성이 적은 환경 속에 사는 사람은 믿음을 실천하고 경험하기에 좋지 않은 상황과 환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불확실성이 크면 클 수록, 우리의 믿음의 실천과 경험의 가능성이 더 좋아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생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계 문제가 아닌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지게끔 하는 믿음도 원하신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니 시도하기에 너무나 벅찬 과제인가?

 

그렇다면 구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성경책에 기록하셔서 우리를 괴롭게 하시길 원하셨겠는가?

분명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로 이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으라고 하는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믿음의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으신 것이다.

그 눈을 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고 시도하는 자들만이 이 놀라운 믿음의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자.

"나는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위 질문에 답이 어렵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가?

"하나님께서 마음을 먹으신다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것이 쉬운일인가? 어려운 일인가?"

 

 

인생을 살아가다 큰 좌절과 혼돈속에서 방황할때가 있다.

삶의 고난은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고난은 그저 우연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일 수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되었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그 속에서 숨겨진 하니님의 뜻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러가지 고난중에서 우리를 아주 혼란스럽게 하고,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때 극도로 어려워하고 심한 경우 자살에까지 이르게도 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사실상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섭리가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승승장구하던 사업가가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는 경우가 있고,

대기업 임원에 대표까지 승진하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권고사직등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어떠한 일도 못찾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그뿐인가? 잘 나가던 운동선수가 부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운동선수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유명한 연예인이 교통사고로 더 이상 연예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위기에서 잘 이겨내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 어려움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위기가 본인에게 다가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특별히 내 정체성이 어떠한 사회적인 위치나 직업에 올인되어 있던 사람들의 경우 아주 위험할 수 있다.

그들의 정체성은 사회적 위치와 직업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러한 위치와 직업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큰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감은 극도로 떨어지고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하여 심한 우울증에 다양한 정신질환을 겪게 된다.

 

이러한 일이 내 삶에 벌어질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1~12)

 

 

예수님이 광야로 시험받으러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이러한 상황을 이겨내고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내 사랑 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말을 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 내셨다.

 

아주 적극적인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작품(?)이었다.

다만, 광야의 시험전 성부 하나님의 처방전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이 말 한마디였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태도 였다.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이 천지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결과물을 낼때 그 결과물로 인하여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많이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우리들이 좋은 결과물을 내지 못할때 사람들이 슬퍼하거나 비난, 무관심한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세상은 실로 그러하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것이기 때문에 열매와 결과물들에 우리의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하신다.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들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으로 기뻐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다시 일어서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실로 그러하기에

우리의 믿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가 중요하다.

 

 

'주제별 성경연구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을 주신 이유  (0) 2019.09.13
진정한 쉼이란  (0) 2019.07.29
정체성이 흔들릴때  (0) 2019.05.30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  (0) 2019.04.22
실존하는 죽음 앞에 선 인생  (0) 2019.01.24
희망을 먹고 사는 인생  (0) 2019.01.24

 

시편 104편 21절.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쉬운성경) 사자들은 먹이를 찾아 으르렁거리고 하나님께 먹이를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사자들은 동물들의 왕이다.

동물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위협적이고 모든 동물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그러한 사자들이지만, 

사자들도 먹이를 좇아 다녀야 하며,

열심히 자신과 무리들을 이끌고 살아내기 위해서 부지런하게 사냥감을 좇아 다닌다.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열심히 그들의 생애를 살아낸다.

 

그런데, 시편에 보니, 단순히 그들이 열심히 사냥감을 좇아가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한다는 구절이 있다.

쉬운성경에는 하나님께 먹이를 달라고 부르짖는다고 표현된다.

 

사자들도 하나님께 구하는데,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해야 하는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장 1절)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날 예배할때 기쁨과 감격을 느낀다.

찬양할때 감정이 고조되고 눈물과 함께 우리의 삶을 드리기로 작정한다.

교제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경험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없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한번 쯤 검증해보는게 어떨까?

 

오늘은 이러한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또 다른 경험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기쁨과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나서 집에오니, 집이 엉망이다.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내와 남편도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나는 또 다시 아이들과 아내,남편에게 화를내고 있다.

그리고 불평,불만이 그냥 속에서 터져나온다.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내가 언제 눈물로 주님앞에 나의 삶을 드리기로 작정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중적인 나의 모습에 더 우울감과 함께 절망감이 다가온다.

나는 실패자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삶의 현장에서는 주일날 예배 드리듯이 기쁘게 살수 없는것인가?

여러가지 의문과 함께 그냥 주일과 일상을 구분해서 다르게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원래 사람은 다 그런것이라며..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 모습에 아이들은 놀라지 않고 똑같이 그리스도인은 원래 이중적이구나..이렇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받아들인 현실로 인하여, 아이들은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인하게 된다.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최소한 가장 가까운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부모는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 오히려 자녀들을 압박한다.

강제로 회심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렇게 회심되는 일은 없다.

 

 

로마서 12장1절에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우리의 삶이, 살 전체가 거룩한 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어려운 일인줄 안다.

그래서 쉬운일에는 전심을 다해서 우리를 드리는것 같지만,

정작 해야하는 삶의 현장에서는 전심을 다하기 보다는 두 마음을 품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 누구도 삶의 현장에서 승리한 것들을 잘 알려주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므로, 본보기가 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것은,

삶의 아주 작은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일을 잘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배우기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지 않고 오직 주님께로만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에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사는이를 찾기 어려운건,

우리 인간의 본성이 원래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지독히도 갈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본성을 거스르는것.

거기서부터 삶의 예배가 시작된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기 위해서는

역시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직 주님앞에 바로 서 있는것...그것밖에는 없다.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것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기도하는것.

 

그길만이

우리를 이중적인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삶의 어디에서나

동일한 '나'로, 동일한 '그리스도인'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준다.

 

코람데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을 매순간 기억하자!!

 

'주제별 성경연구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쉼이란  (0) 2019.07.29
정체성이 흔들릴때  (0) 2019.05.30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  (0) 2019.04.22
실존하는 죽음 앞에 선 인생  (0) 2019.01.24
희망을 먹고 사는 인생  (0) 2019.01.24
때로는 사탄도 억울하다  (0) 2017.06.23

The Sacrifice of Isaac, 1635, oil,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을것을 약속받은 후 25년을 기다림.

1.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때 75세(창12:4)

2. 아브람이 이삭을 갖게 될것을 약속받음 75~76세사이.(창15:1~5)

3.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음. 86세 (약속 받은 후 10년정도 지난시기) (창16:16)

4. 아브람이 이삭을 낳음, 100세(약속 받은 후 25년정도 지난 시기)(창21:5)

 

이삭은 결혼 후 20년 후 야곱을 낳음.

1.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창 25:20)

2. 리브가도 임신을 하지 못하였으나 기도 후 임신하게 됨(창 25:21)

2.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낳을때는 60세(창25:2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이삭을 통해서 온 민족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 그리고 야곱 그리고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는 약속이었다.

 

단순히 아브라함에게만 한 약속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가족, 후손을 통해서 이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이 약속을 알려줬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8~19절)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녀를 통해서 구원자가 오게 되고, 그 구원자를 통해서 온 인류가 복을 받게 된다는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 복음의 통로의 역할을 하는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지만(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그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것 같은 느낌,실제를 둘 모두 경험하게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는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최근에는 여러가지 환경오염과 인스턴트, 각종 스트레스 등으로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시절에는 그러한 것이 많지 않은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에는 자녀를 많이 낳는것이 곧 힘이었다. 그러므로 아내가 자녀를 갖지 못한다는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여부를 떠나서 사회적으로도 비난을 받는 일이 되는것이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자들의 슬픔을 볼 수 있다.

 

결국 사라와 리브가도 이러한 비난을 받으면서 지냈을 것이고, 이러한 어려움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도 그대로 전가가 되는것이었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여부를 떠나서 일상생활도 힘이 드는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모를리가 있을까? 절대 그럴순 없다. 그러한 상황을 모두 아심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이라는 세월을, 이삭에게는 2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다.

 

둘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기다려야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기다림, 인내를 잘 하지 못한다. 가장 힘들어하는 영역일 수 있다.

눈에 보이는걸 좋아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힘들어 한다.

오랜 시간 기다림이 힘든것도..기다리다 보면 약속도 잊어버리고 믿음이 점차 사라진다.

그러한 것을 인간은 견뎌내질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다림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배우게 하신다.

 

아담에게 주신 약속, 그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그리고 계속 이어져 다윗에게..그리고 오랫 역사를 지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일까?

그리고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후 승천하시고 다시 이땅에 오신다고 하신지 2000년이 더 되는 시간이 지났다.

언제 오실까?

아직 1000년은 더 있어야 하는것일까?

하나님은 더 많은 인류를 보기를 원하시는것 같기도 하다.

곧 오셨으면 좋겠지만, 금방 오실것 같지는 않다.

더 많은 하나님의 자녀를 보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듯 하기 때문이다.

 

기다림.

아브라함은 25년, 이삭은 20년 기다렸지만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4000년 이상을 기다리고 계신다.

앞으로 더 기다리실것이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이런 생각이 드니, 나의 기다림은 기다림도 아닌것 같다.

하나님의 오래참음과 기다림. 그것이 결국 사랑이고

그 사랑을 하나님의 사람들은 배우기를 원하시는것 같다.

 

배워도 겨우 25년밖에 안된다.

4000년 이상을 기다리는 하나님에 비해서

우리 인생의 기다림은 너무 짧은것 아닌가?

 

 

 


부족함이 있다면 그건 나의 목자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아니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들어본 성경구절이다.

분명한 결론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다.


나의 인생에 부족함이 없는 것. 이것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이 있을까?

그런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부족함이 넘치는것 같다.

왜 그렇게 부족함이 넘치고,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고, 만족함 보다는 불만족함이 넘치는가?


그것은 위의 말씀을 거꾸로 한번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면, 그것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때문이다.

반대로, 내게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목자가 여호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목자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가?


다른 그 무엇은 사람마다 다를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

어떤 사람에게는 부,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자신.


이 모든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할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가 된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부족함과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면,

나의 목자가 하나님인지, 다른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자.


다윗이 고백했던 그 고백.

지금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다.

나의 목자가 하나님이므로,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고, 하나님이 모든것의 모든것 되시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