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1:21~22)

 

 

 모든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큰것보다는 안전하고 미래가 보장된 삶을 원한다. 그래서 안전한 직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등을 원한다. 경제적으로 안전한것처럼 보이는것이 나의 미래의 삶도 보장해 줄것이라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위의 반응과 그동안의 경험이 그것을 지지해 주는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실이다. 가끔 변수가 생길때도 있지만 분명히 경제적 안정이 우리의 삶을 조금 평탄하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한가지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경제적 안정, 안정된 직장, 안정된 삶이 우리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마태복음 21:21절 말씀은 전혀 적용하기 힘든 말씀으로 보여진다. 우리 삶에 산을 바다에 옮길 필요도 없으며 그러한 일은 정말이지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날 수도 없을것 같은 우리의 경험적 믿음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 믿음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믿음의 수준을 가지고 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가 믿음을 실천하고 믿음을 배우려고 애쓴 흔적을 애초부터 없애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안정적인 직장, 우리의 안정적인 미래, 우리가 만들어 놓은 여러가지 안전장치들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시스템이 주는 안정적인 장치들을 더 신뢰하려고 노력하는건 아닐까?

 

믿음의 삶에 있어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큰것이 더 믿음을 배우고 실천하기에 좋은 환경적 요소라고 생각이 된다. 구지 노력해서 안정적인 환경을 없애면서까지 삶을 불확실성으로 몰아갈 필요까지는 없을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사회시스템이나 다양한 안정적인 장치들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불안감을 없애려는 목적이 크다면, 이건 한번 깊이 고민해보고 하나님과 단둘이 얘기해봐야 할 영역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왔지만,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잘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믿음의 역량, 믿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우리를 좀 더 불확실성이 큰 환경으로 몰아가는 적극적인 태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불확실성이 큰 환경이 우리 앞에 다가올때 분명한것은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고 경험하기에는 더더욱 좋은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확실성이 적은 환경 속에 사는 사람은 믿음을 실천하고 경험하기에 좋지 않은 상황과 환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불확실성이 크면 클 수록, 우리의 믿음의 실천과 경험의 가능성이 더 좋아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생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계 문제가 아닌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지게끔 하는 믿음도 원하신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아니 시도하기에 너무나 벅찬 과제인가?

 

그렇다면 구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성경책에 기록하셔서 우리를 괴롭게 하시길 원하셨겠는가?

분명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우리로 이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으라고 하는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믿음의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으신 것이다.

그 눈을 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고 시도하는 자들만이 이 놀라운 믿음의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자.

"나는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위 질문에 답이 어렵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가?

"하나님께서 마음을 먹으신다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것이 쉬운일인가? 어려운 일인가?"

 

 

인생을 살아가다 큰 좌절과 혼돈속에서 방황할때가 있다.

삶의 고난은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고난은 그저 우연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일 수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되었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우리는 그 속에서 숨겨진 하니님의 뜻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러가지 고난중에서 우리를 아주 혼란스럽게 하고,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고난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때 극도로 어려워하고 심한 경우 자살에까지 이르게도 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사실상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섭리가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승승장구하던 사업가가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하는 경우가 있고,

대기업 임원에 대표까지 승진하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권고사직등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어떠한 일도 못찾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그뿐인가? 잘 나가던 운동선수가 부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운동선수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유명한 연예인이 교통사고로 더 이상 연예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위기에서 잘 이겨내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 어려움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위기가 본인에게 다가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특별히 내 정체성이 어떠한 사회적인 위치나 직업에 올인되어 있던 사람들의 경우 아주 위험할 수 있다.

그들의 정체성은 사회적 위치와 직업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러한 위치와 직업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큰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감은 극도로 떨어지고 사회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하여 심한 우울증에 다양한 정신질환을 겪게 된다.

 

이러한 일이 내 삶에 벌어질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1~12)

 

 

예수님이 광야로 시험받으러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이러한 상황을 이겨내고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내 사랑 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말을 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 내셨다.

 

아주 적극적인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작품(?)이었다.

다만, 광야의 시험전 성부 하나님의 처방전이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이 말 한마디였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태도 였다.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이 천지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결과물을 낼때 그 결과물로 인하여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많이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우리들이 좋은 결과물을 내지 못할때 사람들이 슬퍼하거나 비난, 무관심한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세상은 실로 그러하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것이기 때문에 열매와 결과물들에 우리의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기뻐하신다.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들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으로 기뻐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다시 일어서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실로 그러하기에

우리의 믿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가 중요하다.

 

 

 

시편 104편 21절.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쉬운성경) 사자들은 먹이를 찾아 으르렁거리고 하나님께 먹이를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사자들은 동물들의 왕이다.

동물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위협적이고 모든 동물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그러한 사자들이지만, 

사자들도 먹이를 좇아 다녀야 하며,

열심히 자신과 무리들을 이끌고 살아내기 위해서 부지런하게 사냥감을 좇아 다닌다.

 

힘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열심히 그들의 생애를 살아낸다.

 

그런데, 시편에 보니, 단순히 그들이 열심히 사냥감을 좇아가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한다는 구절이 있다.

쉬운성경에는 하나님께 먹이를 달라고 부르짖는다고 표현된다.

 

사자들도 하나님께 구하는데,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해야 하는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장 1절)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날 예배할때 기쁨과 감격을 느낀다.

찬양할때 감정이 고조되고 눈물과 함께 우리의 삶을 드리기로 작정한다.

교제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경험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없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한번 쯤 검증해보는게 어떨까?

 

오늘은 이러한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또 다른 경험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기쁨과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나서 집에오니, 집이 엉망이다.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내와 남편도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나는 또 다시 아이들과 아내,남편에게 화를내고 있다.

그리고 불평,불만이 그냥 속에서 터져나온다.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내가 언제 눈물로 주님앞에 나의 삶을 드리기로 작정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중적인 나의 모습에 더 우울감과 함께 절망감이 다가온다.

나는 실패자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삶의 현장에서는 주일날 예배 드리듯이 기쁘게 살수 없는것인가?

여러가지 의문과 함께 그냥 주일과 일상을 구분해서 다르게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원래 사람은 다 그런것이라며..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 모습에 아이들은 놀라지 않고 똑같이 그리스도인은 원래 이중적이구나..이렇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받아들인 현실로 인하여, 아이들은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인하게 된다.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최소한 가장 가까운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부모는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 오히려 자녀들을 압박한다.

강제로 회심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렇게 회심되는 일은 없다.

 

 

로마서 12장1절에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우리의 삶이, 살 전체가 거룩한 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어려운 일인줄 안다.

그래서 쉬운일에는 전심을 다해서 우리를 드리는것 같지만,

정작 해야하는 삶의 현장에서는 전심을 다하기 보다는 두 마음을 품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 누구도 삶의 현장에서 승리한 것들을 잘 알려주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므로, 본보기가 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것은,

삶의 아주 작은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일을 잘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배우기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지 않고 오직 주님께로만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에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사는이를 찾기 어려운건,

우리 인간의 본성이 원래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지독히도 갈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본성을 거스르는것.

거기서부터 삶의 예배가 시작된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기 위해서는

역시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직 주님앞에 바로 서 있는것...그것밖에는 없다.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것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기도하는것.

 

그길만이

우리를 이중적인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삶의 어디에서나

동일한 '나'로, 동일한 '그리스도인'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준다.

 

코람데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을 매순간 기억하자!!

 


부족함이 있다면 그건 나의 목자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아니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들어본 성경구절이다.

분명한 결론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다.


나의 인생에 부족함이 없는 것. 이것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이 있을까?

그런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부족함이 넘치는것 같다.

왜 그렇게 부족함이 넘치고,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고, 만족함 보다는 불만족함이 넘치는가?


그것은 위의 말씀을 거꾸로 한번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면, 그것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때문이다.

반대로, 내게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목자가 여호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목자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가?


다른 그 무엇은 사람마다 다를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

어떤 사람에게는 부,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자신.


이 모든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할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가 된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부족함과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면,

나의 목자가 하나님인지, 다른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자.


다윗이 고백했던 그 고백.

지금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다.

나의 목자가 하나님이므로,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고, 하나님이 모든것의 모든것 되시기 때문이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일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서 마지막 날을 지내는 이도 있을것이고,

그 사실을 모른체 평소와 같이 오늘을 지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나 '하루'는 마지막일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날'

무엇을 해야하며..

누구랑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러기에는 24시간은 너무나 짧다.

아니, 100년도 사실 너무나 짧다.


이렇게도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데

사람들은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한채 고통과 괴로움과 불평과 짜증들로 시간을 채워나간다.

혹 그 중에 선한일을 하고 남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다.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 이렇게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체'가 보여진다.

이제야 '인생'을 조금 알게 되는 것일까?


항상 '죽음'이 코 앞에 있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모습들..



모든이들이 거대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 거대한 목표를 이룬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 소수마저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모습.


그리고 거대한 목표에 이루지 못한이들은

어떻게든 그 거대한 목표에 도달하고자 중요한것을 뒤로한 채 끊임없이 매진하는 모습

그리고 그 길에 동참하지 못한 이들을 '낙오자' 취급하는 사람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렇게 믿으며 행동하는 이들은 거의 볼 수가 없는 세상

이것이 실제임을 깨닫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제대로 가르쳐 주는 올바르고 지혜로운 선생이 부족한 시대


이러한 시대에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내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해야 할 사람들을 깨닫고..

오늘 하루를 놀라운 축복의 선물로 깨닫고 힘있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무엇인가 시대와 세상을 변화시키려 살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것에 감사와 최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인이 아닐까?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에는 '거품'이 생겨 버린다.

그 '거품'을 깨닫는 이들은 적다.


그 '거품'이란..

세상을 변화, 개혁 시키고자 시작했으나

나를 유명하게 하고 싶은 '욕망'으로 변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작이 좋았기에..

변질된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권좌에 앉게 되었을때는 이미 눈이 어두워진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단한 업적보다

위대한 사상보다


'현재의 나'

' 그 주변'

' 주어진 일'

에 대한 감사와 행복으로 하루를 사는것이 진정 지혜있는 자가 아닐까?




희망을 먹고 사는 인생.



"당신에겐 꿈이 있나요?"

"아니, 그 꿈을 이룰수도 없는데 뭐하러 꿈을 가집니까?"


"그래도 꿈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것이 아름다운 인생이에요.."


"그럼 당신은 지금 현실에 만족하시나요?"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인생이란..

어릴적 가장 큰 꿈을 꾸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 꿈이 이룰수 없음을 깨닫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그런데 현실에 적응해서 사니, 인생이 행복하지가 않다.

다시금 꿈을 꾸기에는 너무 철이 없는것 같기도 하고, 내 꿈이 뭔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그냥 다른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사니깐, 나도 그렇게 사는것이 맞는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사는 인생이 되는것일까?

이것이 바로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니깐.

나도 특별하진 않으니깐 그냥 평범한 대중이 되고 싶은것이다.



그런데..

분명 모든 인생은 특별하다.

우리는 무언가에 속아서 평범한 대중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안전한곳이 있을까?

그리고 모두가 똑같아질수가 있을까?


희망이 있다는 것.

꿈이 있다는 것.


그것은 죽을때까지 놓치 말아야 할 인생의 본분이다.

모든이들이 이 땅에서 분명히 각자가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

그리고 모든이들이 이 땅에서 분명 각자의 색깔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은 그래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것 아닐까?


많은이들이 일부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것은 인생의 비극이다.

모든이들이 각자의 특색을 나타낼때, 인생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안그래도 비극적인 인생인데, 그나마 색깔있게 살아야 비극적인 인생가운데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지 않을까?


모든이들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꿈과 희망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이 우리를 오늘도 힘있게 살게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자.

그것은 '인생'을 포기한 자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 18장 36절)



우리는 누구의 왕국을 세우기를 원하는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권력으로

어떤 사람은 사역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고, 그곳에서 자신의 뜻에 복종되거나 이루어지는 일을 두고 기뻐한다.

그것이 인생의 깊숙한곳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이므로, 그런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거나, 본인을 아직 잘 모르고 하는 말일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깊숙한곳에 자리잡은 이 욕망.

그 욕망이 포장되어서 명예나, 사람들이 존경받는 위치나, 가장 위험한것은 종교적인 위치로 자리잡을때 우리는 스스로 속게 된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왕국이 아닌 이것은 신의 왕국이라고 자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언제든지 내려올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을 추종하던 모든 이들이 한순간에 떠나버린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본인도 깨닫게 된다.

아..내가 100% 그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그분께서 우리를 그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실까?


그런일은 종종 있을 수 있지만 많지는 않은듯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있다면, 사역보다는 자기점검에

사람들이 원하는 일보다는 주님이 원하는 일을 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적게 들린다면..그것이 바로 경고의 소리다.

내 왕국을 세우려고 자신을 속이고 남들을 속이고 결국 스스로 속인 결과에 자신의 헛된 믿음으로 모든것을 포장하게 된다.


그 포장은 자신의 가장 의롭고 선하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충성된 종이라고 믿게 된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인생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라는것을 깨닫을 수 있다.



나의 왕국인가?

주님의 왕국인가?

나는 왕좌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가?

왕좌의 자리 옆에서 그분의 영광과 위대함과 완전함에 매료되길 원하는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척하길 원하는가..

아무것도 없기에 온전하신 그분 옆에서 온전해지기를 원하는가..


작은 차이지만,

이 차이를 깨닫고 삶에 적용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이 모든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땅에 속한것이 아니다.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내려오셨을때, 그분의 왕국은 실제로 우리들에게 보여졌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본 이들이 무척이나 적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 왕국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 왕국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왕국이 이미 제자들에게 와 있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있다.

그 왕국을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나만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끼여서 괴로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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