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역사상 한국교회는 신생 선교사 파송국에 속하지만, 현재 11,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함으로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양적인 성장이 곧 한국교회 선교의 질적인 성장이라 평가될 수는 없다. 오히려 부정적 측면에서 이러한 급속한 한국교회 선교의 성장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인적자원의 가치와 가능성을 족히 인식하지 못하게 하며, 그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에 대한 적절하고도 전략적인 투자를 도외시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선교현장에 몸담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불필요한 희생을 요구해 온 것이 사실이다.
 
 역자는 선교현장에서 정신적, 영적 "공황"을 토로하는 한국의 많은 젊은 선교사들을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다양한 갈등과 어려움 가운데서 모국으로부터의 특별한 후원이나 도움 없이 멀리 타국에서 "버티기"식의 고독한 투쟁을 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갈등들은 그들이 한국에 돌아온다고 해도 크게 바뀌지 않으며, 때로는 머무를 처소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되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중략..

 역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위치한 선교사 멤버케어 센터인 Heartstream Resources에서 지도자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훈련 중 특히 기억에 남은 말이 있는데, 그것은 선교사 멤버케어는 더 이상 선교사들의 "생존"(survival)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양육하고 성장"(nurturing & growing)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선교는 선교사들에 대해 아직까지는 "생존"을 요구하는 입장이라 갈 길이 멀게 느껴지지만, 오늘도 겸손히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는 신실한 교회와 주의 종들의 헌신 속에서 이 소중한 과업은 꾸준히 진보하며 성취될 것이라 믿는다.

선교사 멤버케어 세계적 관점과 실천 / 켈리 오도넬 편집, CLC
2004년 7월, 서울신학대학교 연구실에서 최형근, 엄은정 
역자서문중에서 일부 글 발췌

 

 

 



2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심령이 괴로워하셨다.
 - 함께 한 제자중에 한명이 자신을 팔것을 알고 계셨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그 얘기를 해야할 시기가 왔다.
 - 예수님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셨을까?
 - 자신의 죽음때문은 아니었을것이고 자신이 사랑을 주었던 제자의 미래의 모습을 봐서일까?
 - 예수님은 12제자 모두에게 배신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배신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신건 아닌듯 하다.
 - 자신을 판 제자의 앞으로의 인생을 보시고 심령이 괴로워하신듯 하다.
 -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 사랑에는 어떠한 조건도 없다.
 - 심지어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때 조차도 그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시며 괴로워하신다.
 - 사랑하는 자신의 자녀들이 '죽음'의 길로 '사망'의 길로 가는것을 기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 예수님은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가룟 유다에게 품었던것 같다.

22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제자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 예수님의 마음은 그 제자를 향해있었지만, 제자들은 '정죄'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 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다른지를 드러내는가?
 - 우리 주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과 인자로 바라보시고 인도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정죄하고 있으니 말이다.
 - 아 우리 인생의 슬픔이 여기서 있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이다.
 -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바로보시고 인식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그러므로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 지금도 동일하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며 사랑하신다.
 -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될것이고, 그 사랑을 전파하게 될것이다.
 -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품에 누워있다. 그냥 누워있지 않고 그 품에 의지하고 있다
 - 우리는 누구 품에 있는가? 그리고 누구를 의지하는가?
 - 우리가 가진 재능,능력, 부인가? 
 - 통장의 잔고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 누구의 품이 가장안전할까?
 -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실제는 그 예수님의 품안에 있지 않고 통장의 잔고 안에 누워있지는 않는가?
 - 아니면 우리에게 '돈'을 주는 '회사'나 그 누군가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 그 뒤에서 우리를 먹여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할때 우리는 요한의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제자들은 12명이었으나, 예수님의 품을 차지한건 요한이었다.
 - 그 품안에서 요한은 누워 쉬고 있다.
 - 우리가 예수님의 품을 의지할때, 우리는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 다른것들은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들이다.
 - 이것을 믿고 있는가?

24절.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 요한은 그냥 예수님 품에 누워있었다.
 -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누구인지 물어본다.
 - '베드로' 그는 자신보다는 항상 남들이 어떤지 관심이 많았던것 같다.
 - 경쟁의식도 심했던것 같다.
 - 다른이들과 비교하여 남들보다 자신이 낫다. 자신이 수제자다. 이러한 것들이 있어보인다.
 -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
 - 항상 주님 앞에, 성경 앞에 나 자신을 점검하고 비교하기보다는 주위의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가?
 - 혹은 역사속에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가?
 - 혹은 성경속에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가?
 - 그러나, 성경은,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과 나를 비교하라고 하신다.
 - 성경에 비추어서 잘못된것은 고치고, 주님의 뜻에 굴복될것을 요구한다.
 -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교회 안의 다른 형제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비교하여 나를 살펴보라 하신다.
 - 아 이 얼마나 엄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말씀인가..
 - 성경에 비추어서 나를 살펴본다면 얼마나 성경과 멀어진 길을 걷고 있는가?
 -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오늘 하루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주님의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애쓴다. 

25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 아마 베드로가 요한에게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요청한듯 하다.
 - 예수의 가슴에 있었던 요한은 누군지 물어본다.
 - 요한이 물어보는 자세를 살펴보자.
 - 그는 예수님의 가슴을 의지하였다.
 - 우리는 모든것들에 있어서 그분을 의지하고 있는가?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 예수님은 그냥 가룟 유다라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왜 구지 떡 한조각을 그에게 주는가? 
 - 마지막까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무리한 해석일까?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 그전에는 유다가 사탄의 조종속에 없었던 것인가?
 - 예수님이 조각을 건네주었고, 그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 결국, 사탄도 우리 주님의 권한아래에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다.
 - 결국, 예수님을 팔기로 마음먹은건 사탄이 유다를 유혹해서가 아닌것이다.
 - 예수님을 팔기로 욕심을 가진건 분명 가룟 유다 본인 스스로 정한것이다.
 - 그리고 그 마음을 예수님은 아셨고, 그 일을 행하라고 유다에게 명령한다.
 - 그리고 그 명령 이후에 사탄도 예수님의 허락 하에 유다의 마음속 깊은곳에 들어가게 된다.
 - 순서를 보면, 가룟 유다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를 본인의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지목하셔서 그 일을 행할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의 권한 아래 사탄은 마음껏 유다를 사용하게 된다.
 - 우리가 잘못한것, 범죄한것, 그것들 사탄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자.
 - 대부분의것들은 우리 스스로 범죄한것이다. 아니 모든것일 수 있다.
 - 하나님께서 사탄을 주관하신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사탄은 마음대로 우리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
 - 우리를 좌지할 수 있는건 오직 우리가 선택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우리의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할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해주신다. 
 -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때 우리에게 복이 있음을 말이다.

28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 말씀 그대로, 제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 분명 예수님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오해했다.
- 오늘날도 동일하게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앞날을 예언해주고 계신다.
- 그런데,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 좋은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속의 욕심때문이다.
 - 우리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마음때문이다.
 -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오늘날, 그 뜻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29절.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 얼마나 예수님의 계획과 차이가 나는가?
 - 예수님이 죽게 되는 것인데,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는가?
 - 우리라고 다를것이 있는가?
 -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왕국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그런데, 많은 순간 우리는 우리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 때로는 세상속에서 우리의 왕국을 건설하기도 하며, 때로는 교회 안에서 우리의 왕국을 건설하기도 한다.
 - 교회 안이라고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뜻을 모르지 않았는가?
 -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뜻이 확실하다고 믿지는 말자.
 - 항상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주의깊게 보는 자세가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왕국을 교회안에서 건설하고 있을 것이다.
 - 인간은 원래 그러하다.
 - 얼마나 인간이 욕심이 많고 그 욕심을 본인들도 잘 모르는지 아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는 포장을 벗어버리고 그 깊숲한 내면의 뜻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참혹한 현장을 보고 있지 않은가?
 -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였던 십자군 전쟁...
 - 아픈역사를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되돌아 보자.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아 역사의 가장 슬픈 현장이여.
 - 유다는 실로 가장 슬픈 현장의 길을 걷고 있다.
 - 그러나 그러한 슬픈 현장의 길때문에 또한 많은 이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 우리가 그 슬픈 현장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슬픈 현장을 사용하셔서 축복의 자리로 바꾸셨다.
 - 얼마나 우리 주님의 역사가 놀라운가..
 -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설중의 역설의 역사아닌가?
 - 영광스럽고 전혀 흠이 없는 그분만이 하시 수 있는 놀라운 역사다.

 - 그 은혜 아래서 오늘 하루도 감격하는 하루를 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다.




 


에스더 4장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순교'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순교자를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도 순교자를 귀하게 여기신다.
순교자들이 받게 될 하늘의 상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대교회시절 교회의 핍박이 심하였을때 순교는 모든 믿는이들이 각오해야할 사항이었다.
그 누구도 피할수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 때문에 순교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자들도 있었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순교의 순간을 가장 영광스럽게 죽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비록 순교하였지만 그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순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야 할것이 아닌게 되었다.
정말 그러한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것 같지 않다.

지금은 비록 선교지에서 철수하였지만,
선교지를 처음 떠날때 나는 순교를 각오했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순교를 하고 싶었다.
그 순교자들의 영광속에 나도 합류하고 싶은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선교지가 이슬람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서 선교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 '순교'가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에 마음으로 대비하고 있다.
어떤 선교단체들은 '순교'에 대해서 서약서를 쓰기도 한다.
그만큼 이슬람권에서 '순교'라는 주제는 실제적이다.

실제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이슬람권에서 3년간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죽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많은 이슬람권에서 순교당하는 선교사들은 정말 극소수다.
오히려 한국에서 교통사고나 기타 재해로 사망하는 이들이 훨씬 많을것이다.

이슬람권에서 선교하면 IS의 타겟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데, 물론 그럴수 있다.
그러나 IS의 타겟은 주로 이슬람을 믿지 않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므로 오히려 이슬람권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것이 위험한것은 분명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슬람권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야한다.

암튼, 나는 이슬람권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생활을 하였었다.
실제 그러한 위험에 노출된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가 있었던 지역이 강경 무슬림지역은 아니어서 그렇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여러번 '순교'의 순간을 내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 지내는 '아내'와의 갈등을 통하여 나는 더 높은 차원의(?) 순교를 경험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동감하지 않을수 있지만,
내가 아직 철이 안들고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순교'란 나에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 주제였다.
어차피 그들이 나를 죽인다고 협박(?)하고 죽이기로 하였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요구한다면 나의 신앙양심상 절대 그럴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나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나를 죽일것이다.
나의 순교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
나의 순교에 대한 생각은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는것 뿐이었다.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것이었다. 물론 선교지를 간것 자체는 적극적이었지만, 그 순교의 상황에서는 수동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수동적인 '순교'를 경험케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로 하여금 내 십자가를 지고, 나의 육신을 쳐서 복종케 하고, 성령께 굴복해야하는, 나의 의지를 반드시 드려야 하는 그 '순교'를 경험케 하셨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IS에 의하여 내 목이 베어가는 일은 어찌보면 나에게 쉬운일이었다.
왜냐면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육신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성령께 쳐서 복종케 하는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의지를 드려야했고, 주님께 나를 의탁드려야 했으며, 수많은 갈등속에서 피를 토하는(?) 내적인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의 순간을 지나고 나서 나를 성령께 의탁하였을때, 조금 더 주님을 배울 수 있었던것 같다.
이러한 것이 삶에 계속적으로 쌓이게 되면, 정말 영광스러운 순교의 순간에도 주님이 인도하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험한 '순교'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것들이다.
'순교자'란 이슬람권 선교지에서만 탄생하는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수없이 도전받고 갈등되는 상황에서 '육신'이 아닌 '성령'께 순종하는 삶.
그것을 '순교자'의 삶이라고 한다면 과한것일까?

오늘 이 순간도 우리는 내적 갈등속에서 '순교자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삶을 수없이 살아낸 많은 그리스도인이 받게 될 영광과 실제 목숨을 받쳐서 죽음에 이르렀던 순교자들의 영광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만 평가하실수 있겠지만, 큰 차이가 없을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순교 당할 수 없는 이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직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면 언제든지 내 목숨을 주님께 드리는 순교자의 길을 걷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닌것 같다. 주님께서 일상의 많은 순간 속에서 나를 순교자의 삶으로 빚어가는것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삶'을 살아갈수 있기를 오늘도 소망해본다.


 

 

때때로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듯 하다.
분명 본인들이 지은 죄를 가지고 본인들이 회개치 않고 사탄에게 그 책임을 돌리기 때문이다.

전혀 사탄은 그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어떠한 영향력도 주지 않았는데 사탄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도록 하는데 최고 1인자다.
그리고 사탄은 그의 추종세력들과 함께 많은 이들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그 일에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런데, 어쩔때는 사탄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도 계획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일들이 있다.
그일을 사탄은 참 좋아한다. 그런데 사탄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기도 하다.
왜냐면 사탄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는데, 죄를 지은이들이 그 원인을 사탄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니 방해하기 위해서 세운 전략이야."
"사탄이 우리 가정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자기와 나를 해방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인듯 하나 정확하게 그 죄의 원인을 사탄으로 결론짓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대화들이다.

야고보서 1장 14~15절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 야고보서에서 얘기하는 한가지는 욕심을 그 원인으로 얘기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 중심에 그가 원하는 자기 욕심이 있으며, 그 욕심에 의하여 사람들이 미혹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욕심을 제어하지 않고 뿌리 치지 않으면 그 욕심이 무엇인가를 생산한다고 한다.

사람이나 동물만이 자녀나 새끼를 낳는것이 아니라 이 '욕심'이라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떠한 분명한 실체도 자녀(?)들을 낳는다고 한다.
그 욕심의 자녀는 다름 아닌 '죄'다.
또한 그 '죄'가 자라서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모두 죄인들이다.
죄인들중의 특성중 하나는 '자기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적당한 욕심이 있어야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욕심'이 과해지거나 그 '욕심'을 이루고자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고 주위의 사람들의 가치보다 본인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이 더 높아져 있을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욕심'이 원하는데로 내어주면 결국 '욕심'이 잉태하게 되고 '죄'를 낳게 된다.
그 '죄'로 인하여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어두움에 처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어두움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는 그 죄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해야 한다.

사탄이 방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탄이 아니라 내 안의 욕심이 여러 죄악들을 낳게 되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원인을 사탄에게 돌려서 남탓 할게 아니라, 내 마음 중심의 욕심을 파악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외부에 있지 않으며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탄'에게 핑계 대지 말고 내 마음 속의 '욕심'에 대해서 민감히 반응하고
욕심에 이끌려 죄에 이르렀다면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으로 하여금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사탄에게 죄의 화살을 돌려서 스스로 합리화 하지 않고,
회개하여 깨끗한 양심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하지 않을까?

이상한 말로 들릴수 있겠지만,

사탄도 얼마나 억울할까?를 한번 생각해보자!!


 

 

돈만 있으면 한국만큼 살기 좋은 곳은 없다고들 얘기한다.
많은 나라를 가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저곳들을 많이 다녀봤는데 위의 말이 사실일 수도 아닐수도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원하는것을 얻을 수 있는 사회가 한국이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원하는것을 얻을수 있다는것이 살기 좋다는 결론을 낼순 없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밤 12시에도 배가 출출하면 치킨을 시켜먹을수 있고, 집까지 배달을 해준다.
24시간 일하는곳이 주위에 널려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들을 가보면 정말 중심가가 아니고서는 6시 이후에는 대부분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최소한 내가 다녀본 나라의 지역에서는 치킨을 저녁 늦게 배달해주는 곳은 없었다.

그만큼 한국은 낮,밤없이 사회 곳곳에서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좋은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좋은것일까?
그렇게 밤,낮 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

내가 프로그래머로 일할 시절 한국에서는 낮, 밤 없이 일했고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졌다.
그시절 외국출장도 여러번 갔었는데, 프로젝트 기간은 짧았고 그 기간안에 일을 다해야 했었다.
그런데 특이한것은 6시만 되면 같이 일해야될 현지 엔지니어들이 다 퇴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일을 할 수 없기에 어쩔수 없이 나도 퇴근하면서 답답해 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일해서는 2주 안에 끝내야 할 프로젝트를 끝낼 수 없다는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은 참 열심히 일한다.
야근하는것이 당연하고 정시에 퇴근하면 눈치를 주고, 일 못하는 사람으로 찍히고 승진에도 어려움이 있다.
일하지 않더라도 저녁에 야근을 해야지 인정을 받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러다보니깐 일의 양도 야근을 해야지만 할 수 있는 양이 주어진다.
그러니 일자리가 더 부족할 수도 있는것 같다.
모두 8시간 일할 양이 주어진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구지 한사람이 12시간씩 일해야 하니 다른 사람이 일할 양을 뺏어오는것 아닌가?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준 일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동물,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이름 짓는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인가?
그런데 이 세상 모든 만물,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과 하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지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상력, 창조력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그것을 이용해서 정말 아름다운 이름들을 동물들에게 지어주었다.
그 일은 행복했었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최초의 일이었다.
그런데 범죄한 이후에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려야만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하여도 하나님께서 최초에 주셨던 '일'의 즐거움이 상실되는 건 아니었다.
'일'이 주는 기쁨은 유지되지만 거기에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주시는 기본적인 전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이 '일'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이 될때 문제다.
그리고 그 '일'이 지나쳐서 우리의 일상생활(가정, 개인의 삶 등)을 헤쳐버릴때 문제가 발생한다.
'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한 위치로 옮겨질때 문제는 발생한다.

지금의 현대 한국사회는 '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한 위치로 격상된것 같다.
그 밑바탕에는 '권력, 부, 명예'등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사람의 기본적인 양심을 무시하고 일을 처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며
인간성을 상실하고 오직 이윤추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들도 해버리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마음을 지키며 일에 임해야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인것 같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며,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직업에서 기쁨으로 일하는지? 아니면 어쩔수 없이 돈벌기 위한 기계처럼 일하는건지 고민해봐야 한다.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할때 사장의 마인드로 일하는지, 그냥 하루하루 어쩔수 없이 시키니깐 일을 하는건지 고민해야한다.

문제는, 직장에서 만족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지키며 일하는 사람이
가정과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그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가르쳐온것이 한국교회의 주소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의 균형을 항상 가르쳐왔다.
특별히 한국은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많은 우리 부모시대들이 열심히 일해왔었다.
어찌보면 그것은 필수적이었을 수 있으나 지금은 그 상황들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가정들이 무너져있으며, 많은 부분이 '돈'을 위해서 무리하게 '일'하는 분위기 속에 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집값의 문제이며 자녀교육의 문제이며 이 모든것들에 대해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서 고민을 하고 개인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들은 실천해야 할 중요한 시기인것 같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해온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이것을 되돌아 봐야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이 한국사회 속에서 지나치게 일해온 것이 교회 안에도 동일하게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신앙이 훌륭하다고 평가받으며,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반대로 평가받는 분위기가 있다.
이것은 한국사회와 동일한 모습이 교회안에 스며든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경계하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현 시대를 읽을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현 시대를 읽기 위해서는 '역사'를 살펴보고 '교회사'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과거를 통해서 현 시대의 문제점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수 있는지 분별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역사를 통해서 분별해야 한다.

교회안에서 열심히 일하여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 가정이 무너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또는 교회 안에서는 인정을 받지만 사회속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주어진 역할을 하며 모든 일들을 기쁨으로 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찾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회속에서 사는것인가?
정말 그런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는듯하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항상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사회속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것이다.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인하여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지만, 그 충성으로 인하여 가정이 무너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또한 가정을 든든하게 세우기 위해서 가정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을 다함이 우리의 사회속에서 교회에서 해야하는 역할들을 무시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역할들이다.
이 역할들이 지금 이시대에는 정말 어려운 일일까?
이러한 역할들을 잘 해내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기 어려운 일은 왜일까?
이러한 역할들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넘친다면,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받지 않을까?
'믿음'은 '삶'이고 그 삶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언제 어디서든 넘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나도 아직 이러한 향기를 넘치지 못하는 것 같고, 이렇게 향기를 넘치는 사람을 잘 못본듯 하다.
나부터 이러한 향기를 넘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분 앞에서 잠잠히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하겠다.

 

 

 

모세에게 광야가 필요했던 이유


히브리서 11장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절.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출애굽기 2장 11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절.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절.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절.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르시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히브리서에서는 분명 모세는 이 세상의 명예와 낙보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았다.
영적으로 깨어있었고, 한번 뿐인 삶을 이 세상의 즐거움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분명 순전했으나 그의 행동은 많은 교정이 필요했다.
아주 열정적인 모세는 그 동족이 괴롭힘 당하는걸 견디지 못하고 애굽사람을 죽여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동기는 분명 동족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으나, 그 감정은 조절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돌려보내신다.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시간동안 모세를 아무것도 아닌자라는것을 알게 하시며 훈련시키신다.
결국 모세는 그 40년 동안 정말로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걸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주를 섬기기 원하고 그 열정이 정말 높다면 주님은 분명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실 것이다.
열정과 순전한 마음을 주님이 받으시고 우리의 모난 부분과 사용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들을 다듬으시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신다.

그 광야는 정말로 복된곳이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시는 곳이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통하여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통하여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우리의 어떠한 행동과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어떠함 그 모든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은 광야뿐이다.

우리가 평생 광야에 머무를순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코스는 필수코스다.
그러므로 모든이들이 우리를 외면하고 배신하였을때, 그때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잊지 말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는데, 모두 배신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배신할때, 그때는 아버지 하나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 찬스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우리들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쓰임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광야로 다시금 돌아가자!!
아가서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에 기록된 2장 10절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함께 갈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스런 목소리가 느껴지고, 나를 너무나 이뻐하는 주님의 마음이 전달된다.
그리고 저러한 음성을 직접 듣고 그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아가서와 같은 말씀이 직접 들려진다면 어떠한것 고려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길을 갈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정상적인 제자들의 반응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신약의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셨다.
마가복음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가서 말씀과 마가복음 말씀은 같은 말씀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분명 예수님은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뒤에 자기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부연설명까지 해주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것 같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니깐 그냥 기쁨에 아니면 순종하는 마음에,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의 당연한 도리로 따라갔을까?

제자들이 분명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였을때, 따라 왔다.
그러나 그 뒤의 말씀이 우리를 되돌아 보게 한다.

마가복음 15: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셨다.
제자들이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나서 함께 가려고 하였지만,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흘러가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함께 갈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가자는 음성을 듣기를 좋아하는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을 두려워하는것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길로 주님이 우리를 이끄실때는 기뻐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다른 길들로 인도받을때 그 길에서 도망치지는 않는가?

십자가의 길, 분명 좁은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운데에서도 적은 이들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지금도 여전히 소수지만 이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할때 함께 갈 수 있는가?
제자들도 모두 함께 가는 행동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모두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왜 예수님을 버렸는지 묵상해볼 필요가 있고, 예수님이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그 음성에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응답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길이 험하고 남들의 비방을 받고 버림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 마지막에 영광스런 주님께서 우리를 맞아 주실것이다.
세례요한의 마지막이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는 목베이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버려도 된다는 당위성을 제공하진 않는다.
먼저 제자들이 한 행동을 교훈삼고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드럽고 사랑스런 음성에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선교지와 한국에서의 삶이 다른 이유 중 큰 요소는 환경적인 요인들이다.
선교지에서 돌아온지 8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잊고 지내고 있던것들이 불현득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는 전기가 끊어지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전기가 자주 끊어졌었는데, 그로 인하여 전기가 얼마나 감사한지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전기가 끊어지지 않는걸 감사히 여기지 않고 있었다.
 한국은 수도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비가 오고나면 2-3일정도 수도가 끊어졌었는데, 실제로 전기가 끊어지면 많이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수도는 엄청 불편하다.
집안에 항상 물이 나온다는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잊고 살고 있었다.

 

 비자를 갱신하지 않아도 된다. 짧게는 6개월 보통은 1년 단위로 비자를 갱신한다. 그런데 비자를 갱신해야 될 시기에 1-2달정도는 불안하다. 믿음으로 비자가 연장될거라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에 불안한 마음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기간에 기도를 많이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시기도 그러한 기도를 해야할 이유도 없다. 자기가 속한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그로 인하여 쫓겨날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었다.

 

 좋은 병원이 있다. 아이들이 아프면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그래서 아프면 기도하고 돌봐주고 인터넷찾아봐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의학정보 찾고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든지 아프면 찾아갈 병원이 있고 100%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정확하게 진단하는 전문의사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오히려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도 의사가 있음에 감사하다.

 

 약속을 사람들이 잘 지킨다. 그리고 일처리가 한국은 빠르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월요일에 일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이 일주일, 이주일 길게는 한달이 걸리기도 한다. 인내의 끝을 보게 한다. 그리고 얼마나 내가 바쁘게 살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인지 테스트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일이 거의 없는듯하다. 약속하면 정확하게 사람들이 약속을 지킨다. 

 

 먹고싶은걸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한번은 아니 여러번 우리가족은 김을 서로 먹기 위해서 싸웠던것 겉다. ㅎㅎㅎ 근데 이제는 그 김을 거들떠보지도 않을때가 많다. 어떻게 이럴수가..
 보고싶은 사람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 보고싶은 사람을 볼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시간이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지도 않는데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서관에 가면 어마어마한 책들이 있다. 한국책이 가장 그리웠다. 그런데 이곳에는 엄청난 책들을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도서관과 서점들이 즐비한다.

 

 도로가 너무나 잘되어 있다. 그래서 승차감이 너무좋다.
 공원들은 어떻게 이렇게 잘 가꾸어 놓았는가?
 이마트에 가면 없는게 없다. 

 ...... 

 

 선교지에 비하여 한국에 있는 것들을 적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대하는 모든것들 그것을 평소에는 감사히 여기기가 힘든것 같다. 그것을 잃어버렸을때 그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그 가치를 알았다가도 다시금 익숙해지면 또 다시 원래 그런것처럼 감사히 여기지 않는것 같다. 그래서 깨어있어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것들..실제 작지 않다. 엄청난 것들이 많다. 그러한 것들에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에서의 환경이 주는 소소한 감사들이 있지만 이러한 소소하게 잘되어있는것들이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때로는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많은것들을 갖추고 있고, 많이 받았지만 오히려 '헬조선'이라며 불평이 극에 치닫는 한국사회..앞으로 더 좋은 환경과 더 많은 것들을 받게 되면 그 '헬조선' 이 '헤븐조선'으로 바뀔 수 있을까?

 사실 위에 열거한 한국에서 감사가 되는 환경들이 선교지에는 없다. 그래서 그런 환경을 적응하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처음에는 불평도 하기도 하고 감사도 하면서 지내지만 2-3년정도 지나면 환경은 적응하여 크게 불편함을 모른다. 환경은 그러한것 같다. 금방 적응하고 익숙해진다. 그래서 환경적인 어떠한 요소에 대하여 감사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것은 신앙에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얕은 수준의 신앙이 아닐까?

 삶에 있어서 어떠한 일들이 닥쳐도 감사하는 삶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인데, 그러한 감사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오늘 내가 진정으로 감사해야할 제목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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