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명성교회 세습문제로 교회 안팎이 시끄러운것 같다.
오죽했으면 JTBC에서 여러차례 이 내용을 다루었을까?

정말 교회의 세습이 문제인가?
성경적으로 교회의 세습이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얘기해주는 사람을 잘 보지 못한것 같다.

성경은 과연 세습에 대해서 문제라고 얘기할까?
먼저 '세습'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를 좀 살펴봐야 할것 같다.

세습 : 한 집안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

국어사전에는 '세습'에 대한 범위가 한 집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명성교회측에서는 '세습'이라는 용어가 아닌 '계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달라고 주장한다.
그럼 계승은 어떤것인지 살펴보자.

계승
조상 전통이나 문화유산, 업적 따위를 물려받아 이어 나감. [비슷한 말] 수계10().
선임자 를 이어받음. [비슷한 말] 승계2() ㆍ승사4().

계승은 범위가 '가족','조상'도 되지만 가족과 상관없는 관계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명성교회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계승'이라고 표현해도 틀린말은 아닌것 같다.

세습이었든 계승이었든 그 용어가 중요한것 같지는 않다.
분명한건, 성경에서 교회의 목회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목회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어도 된다,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어떠한 구절도 없다.
단지 찾아볼 수 있다면..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교회를 잘 목회할 것을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기타 서신서에도 '바울'이 교회의 인도자들을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목회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 다양한 측면에서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봤을때, 목회를 세습,계승 하는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이렇게 엄중하고도 어려운 일을 본인들이 아버지를 뒤이어 한다는데 칭찬하는것이 당연한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들일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고 담임목사가 된 것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장로들이 된것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이 교회의 리더십들이 가지고 있는것 아닐까?

교회의 주인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다스려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것을 잃어버린 교회는
담임목사나 목사,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것이 성경적인 것이지만, 그 다스림은 항상 주님의 복종아래 있는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문제인가?
그렇다면 작은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는 대형교회도 아니며, 작은교회가 잘하는것도 아니다.
어떠한 교회든지, 그 교회의 주인이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가 아닐때 발생한다.

교회가 주님의 뜻에 굴복하고 인도되기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명예를 좇아갈때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모든 교회는 타락할 수 있다.

이미 깊이 타락한 교회는 회개의 기회가 영영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주님은 계속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타락한 교회들이 회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 넘쳐나는 로마카톨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명성교회 세습 반대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한번 타락한 교회가 다시 회복되기는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명성교회는 교단을 탈퇴하고서라도 자기들의 길을 갈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항상 그런식으로 일한다.

내 자신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더 이상 귀울이지 않는다면
그때보다 사탄이 일하기 쉬울때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듣지만, 누구나 넘어져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경계는 내가 믿고 있는 형제들의 권면을 듣지 않을때... 그때는 위험한 때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것만 옳다라고 생각이 들때 그때는 위험하다.
그때는 성경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기존에 자신과 교류했던 경건한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자신의 상태를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명성교회 문제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성장해가고 있는지,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한것 같다.
우리 주위에서 성경적으로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고 주님의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진다.


오...주님께서 마지막 이때에 경건한 자들을 많이 일으켜주시기를 간구한다.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얻게 된 것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바치면서까지 이러한 교회를 존재하게 하였는가?

이는 피조물인 사람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창조주인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수준과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하실때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자 은혜일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들을 한다.
교회의 대부분의 행사나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듯하다.

그런데, 교회의 존재론적인 이유를 생각해보고 성경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면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거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실천이었고 앞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것을 행하신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때 진정한 만족과 평안과 감사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몸된 교회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놀라운 지체로 삼아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복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행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영원토록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전혀 없으시기에 교회를 존재하게 할 이유가 없으셨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지위를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교회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이 사실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인식할때,
그때가 사실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복이 임하는 순간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
그 교회의 존재 목적을 우리가 진심으로 알게 될때, 그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함께 지체로 지음받은 우리도 동일하게 받게 된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몸된 지체이므로 그 영광을 함께 받아 누리게 된다.

영광스러운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받으셔야만, 우리에게도 복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존재케 하신 이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놀라운 영광이 되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이다.

에베소서 5: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중요함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교회란 무엇이죠?'라고 질문한다면 명확히 이해하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본인이 말한것에 대해서 실천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그냥 우연히 교회에서 하나님을 알게되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에 다니다보니 사람들과 사귀게 되어서 그들과 친분도 쌓고,
또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일들도 하게되고 직분도 맡게 되면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이제는 그러한 생활이 익숙해져서 삶의 중요한 패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본질적인 질문에 대하여 해보아야 한다.
교회란 무엇인가?

들었고 배웠던것 말고, 본인이 소화해 낸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이 어려움에 빠지거나 교회에서 상처받거나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보게 되는 시기에 '교회 다닐필요 있어?'
라고 말하면서 나홀로 신자가 되거나,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채 살아가는 안타까운 삶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교회란 무엇인가?
아..쉬운것 같지만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싶다.

인생이 무엇인가?
왜 사는가?

쉬운것 같지만 어려운 질문들..그러나 인생에서 이러한 고민을 깊이 하지 않으면 남들과 똑같이 흘러가는대로 살아갈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고민해야 하고, 그 고민의 심층부에서는 성경과, 기도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가운데 얻은 대답들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좀 멀리 왔지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교회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들을 엮어가야 할까?
대부분의 전문적인 책들은 서론은 그 분야에 대한 '역사'로 부터 시작된다.
그러기에 이 질문도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로부터 시작하는것이 어떨까 한다.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사도행전에 나오듯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교회가 시작되었나?
분명 맞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때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가 나타나기까지는 계획이 있어야 했고, 교회가 세상에 소개되기까지 구체적인 실행들이 있어왔었다.

그 계획과 실행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찾아봐야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첫 개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교회를 생각하고 계획했던 분께로 가까이 가보자.

인류를 만들기 전,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그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생각하셨는가?
그렇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그 때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생각하셨던 것이고 이 '교회'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셨던 것이다.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교회가 시작되고 얻어지는 과정에서의 실천들은 하나님이 최초 계획하셨던 실행방안에서 바뀌었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건 인간이 범죄를 하였든, 범죄를 하지 않았든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에 대한 분명한 계획이 있으셨고, 이 교회를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셔던 것이다.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사랑도 완전하셔서 아무런 다른것도 필요치 않으셨는데, 갑자기 왜 이런 계획을 하신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다라는 명제로 시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셔서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충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넘쳐 넘쳐 흘러서 자신의 사랑을 나누기에 가장 적합하고도 완전한 어떠한 것을 더 창조하시길 원하셨던 것 같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셨나?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지혜로 다 알 순 없지만, 성경전반에 흐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보았을때,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셔서 이 교회를 만들기를 원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영원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더욱 넘치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 대한 계획을 하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천지를 만드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교회'를 알려주시고 이 사람들이 '교회'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하나님 수준으로 알기를 원하셨고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면 '교회의 성도들, 사역들, 건물, 등등'이 있다. 그런것들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계획하시고 만드신 주인이신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얘기하면 그 대부분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계획하시고 만드신 설계자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적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지만 교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얘기들을 하는걸 보면 대부분, 아니 100%가 사람에 대한 실망, 상처 들이다.
하나님께 상처받았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사실상 없는것 같다.
그런데 실제 교회에 대해서 얘기할때는, 이 사람들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대화속에는 하나님은 없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교회'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잡히지 않아서 그런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교회의 시작.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실천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계획한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편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면을 계속적으로 넓혀 가야 할 것이다.
  1. 배경
    1. 기자 : 요한
    2. 시기 : 주후 90년
    3.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포함,
      1. 초기 3세기 동안 교회를 위협한 매우 위험한 이단
      2. 모든 물질은 악하고 비물질은 선하다.
      3. 죄의 욕구를 정복하고자 금욕주의자 되거나, 육체가 끄는데로 방종에 빠지는 자유 분방한 사람이 됨
      4. 지식의 초월성과 물질의 불순성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아래와 같은 결과 나옴
        1. 지식이 모든 것이며 몸은 무가치 하다면, 높은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 몸은 부서지고 으깨져야 함
        2. 또는, 몸은 더 많은 지식을 그 안에 담기 위해 온갖 부끄럽고 부정한 경험을 할 수 있으며, 몸은 본질상 악하기에 아무리 방임해도 더 악해질 수 없으며 또 빛을 받은 영혼은 몸에게 오염될 수 없기 때문이다.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참 인성을 부인함
        1. 하나님 안에 신성의 충만이 거한다면 어떻게 그분이 진짜 사람이 되어 물질적인 몸을 소유할 수 있을까?(그들은 모든 물질을 악하다고 믿음)
        2.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실제 인간이 아니었고, 혈과 육이 아니었고, 사실은 환영이었다고 가르침으로 그 문제 해결하려 함 -> 가현설
      6. 초기 영지주의의 시조는 마술사 시몬, 세린투스
        1. 세린투스 AD 90-100년경 활동
        2.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요한은 그의 가르침을 논박하기 위해 서신을 썼음
        3. 이원론적인 세계관(하나님보다 열등한 능력에 의해 물질이 창조되었다고 믿음)을 받아들였고,
        4. 색다른 기독록 설파 - 예수님은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미덕과 지혜를 부여받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과 그리스도(세례 받을 때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님에게 기적을 행하고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선포하게 했으나 죽기전에 그를 떠남)을 구분하였음
        5. 결국,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죽고 부활했지만,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였기에 고난을 받지 않았고, 죽지 않았고, 피흘리지 않았음
    4. 위와 같은 영지주의의 배경하에 사도요한이 요한서신을 씀
    5. 서신의 특징(문체, 구조 등)
      1. 보통 바울의 서신들은 전반에 교리적, 후반에 실제적인 얘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서신은 그런 형태가 아니며 거의 분석이 힘듬. 
      2. 로보트 로 교수 " 극히 단순한 문장구조와, 논리의 전후 관계를 연결하는 접속어의 부재 등의 히브리식의 작문법의 특징이 눈에 띔", 비록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기자가 내내 구약의 구절의 가락과 운율을 떠올리며 글을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서신 안에 히브리 작문을 모방했다는 두드러진 증거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기자만큼 그 생각과 표현방법이 자신도 모르게 구약의 방식위에 형성된 채 글을 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3. 요한의 사고방식은 나선형임, 사고의 흐름이 한곳에서 다른곳으로 일직선으로 이동하지 않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과 같이 항상 같은 중심을 돌아간다. 독술가 날듯이 매번 더 큰 원을 그리며 위로 올라가면서 의와 사랑과 진리라는 세가지 주제를 반복해서 다룬다.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라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창조가 시작될때부터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 이 말씀은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서 우리를 살게 하는 역동적인 생명의 말씀이다.
   - 우리를 살게하는 이 말씀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
  2) '우리가 들은 바요'
   - 우리의 인생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졌다.
  3) '눈으로 본 바요'
   - 우리의 두 눈이 직접 이 말씀을 대면하여 봤다.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4) '자세히 보고'
   - 우리는 이 예수그리스도를 대충이 아닌, 자세히 본 것이다.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만지시는 예수그리스도를
  5) '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라'
   -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직접 예수님을 경험했다.
   - 물론 위의 말씀은 사도요한의 경우에 직접 말씀, 문자 그대로 경험한 것이다.
   - 그러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우리에게는 몸된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듣고 보고 자세히보며 직접 만지지 않는가?

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이시니라
 1)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 '생명'- 살다. 생기있는, 살아있는
  - 살아 있는 이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보여졌다.
 2) '이 영원한 생명'
  - 이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우리 인생이 가진 생명이 아니다.
  -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이다. 죽음이 결코 이길수 없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그 생명이 나타난 것이다.
 3) '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 이 영생을 보았고(실제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사건을 보았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로 올라가는 것도 보았다.)
  - 그 사실을 이제는 증거하고 우리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4)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 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설명한다.
  -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었다.
 5)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이시니라'
  -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셨고, 하나님과 깊은 사랑가운데 있는 제2위격인 성자 하나님이셨다.
  - 그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1)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 우리 뿐만 아니라 이렇게 서신으로 너희들에게(우리들에게) 전하여 주는 목적은
 2)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 우리들로 하여금 사도요한과 동료 사도들(성도들)과 사귐을 갖도록(서로 알고 친분과 관계를 가지도록) 서신을 쓰고 있다.
 3) '우리의 사귐은'
  - 그런데, 사도요한의 사귐에는 특별한 것이 있는데..
 4)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사도요한의 사귐에는 성부하나님, 그리고 그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누리는 사귐, 친교가 있었다.
  - 사도요한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귐의 관계는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누리는것에 있었다.
  - 사도요한이 하나님과 누렸던 이 사귐은 무엇이 있었고? 우리 인생들이 사람들과 사귀는 것과는 어떤것이 다른가?
 5)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 '우리가 이것을 씀은'
  - 사도요한의 첫번째 편지목적은 사도요한이 교제하고 있는 이 하나님과 함께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
  - 그리고 이제 두번째 목적을 밝히는데, 그것은 사도요한과 함께하는 이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고 있다.
 2)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이 편지를 씀으로 사도요한은 물로 사도요한과 사귐이 있는 이에게 기쁨이 충만케 된다는 것이었다.

 3) 흠정역에는 '우리의' -> '너희의'로 기록되어 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교회의 사역자는 가난해야 하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사역자이다.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사역자는 full-time 사역자들을 얘기하고자 한다. 목사, 선교사 등 세상의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교회를 세우거나 교회의 양떼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린 이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교회의 사역자가 가져야 하는 '이미지'나 '덕목'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롤 모델로써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고자 하는바와 일치하는지 우리는 항상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목사,선교사는 가난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선교지에 있을때 재미난 일이 하나 있었다. 선교사들이 차를 살때 한국교회 성도들을 배려해서(?) 또는 의식해서(?) 차의 브랜드에 대해서 고민해서 사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벤츠가 가장 저렴하였다. 저렴한 벤츠는 100~200만원으로 살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차를 사면 수리비때문에 더 고생한다. 그리고 아우디, 혼다, 토요타 등 일본차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차도 있었지만, 부품구하기가 어렵고 내구성도 일본차에 비하여 좋지 못하였기에 별로 인기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주로 일본차인 혼다나 토요타를 많이 선호했다. 선호하는 이유중에는 일본차가 확실히 내구성이 좋았고 여러가지로 장점이 많았었다. 선교지마다 차들의 종류가 다르겠지만 내가 있었던 지역에서는 토요타나 혼다가 주로 선호되는 브랜드였다. 그런데 선교사들중에 벤츠나 아우디를 타고 다니는 선교사들은 못본것 같다. 벤츠는 분명 좋은차였으나, 벤츠를 타고 다닌다고 하면 한국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난건 벤츠나 토요타나 가격에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년식이 오래된건 벤츠가 훨씬 저렴한것도 많았다. 벤츠가 더 저렴하더라도 벤츠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선교사들은 한국성도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사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국내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은 오죽할까? 얼마나 더욱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성도들은 만족하는것일까? 이는 성경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사들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고, 또 한편으로 잘못된 사역자에 대한 '이미지'를 사역자들에게 강요하는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1,12절 말씀에 보니 사도바울이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 그리고 본인이 어떠한 형편에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으로 사역자는 이렇게 살아야한다라고 결론지을 순 없겠지만, 어느정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성경의 관점들은 있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11절 서두에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분명 사도바울은 이 글을 쓸때는 궁핍하지 않았던것 같다. 그러면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사도바울은 기록한다. 이 말은 사도바울은 가난할때도 있었고, 부할때도 있었다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본인이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12절에 구체적으로 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비천에 처했었다. 그리고 풍부에 처하기도 했었다. 배부른적도 있었고, 배고픈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가난한적도 있었고, 부한적도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건 그가 가난하고 부한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풍부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가장 부요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 부요한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셨고, 모든 배고픔과 어려움을 친히 경험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때 가난하게만 지내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원래 그분은 부요하신 분이시다. 단지 그 부요함을 이땅에 살때 잠시 버리신것 뿐이다.

자. 다시 원질문으로 돌아와서 사역자는 가난해야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사역자는 가난할수도 있고 부할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가난에 처하든지 부에 처하든지 그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주님 안에서 마음을 굳건히 하는 자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역자는 가난해야 한다라고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그것을 사역자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에 대해서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역자들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를 본인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괜한 고생을 하게 된다.
사역자는 부해야 한다라고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어떨까? 이 또한 문제가 있다. 성경은 사역자는 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이렇게 가르쳐 진다면 교회내의 가난한 이들이 힘겨워할 수도 있다.

사역자는 가난과 부, 그 어떠한 것에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 가난해 지는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부해지는것 또한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더욱 어려운건, 가난하든, 부하든 그러한것에서 자유로워지는것 이것이다.
이것은 실로 간단하지 않다. 성경은 항상 '돈'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데 그 '경계'의 근본 가르침은 '돈'을 가지지 말것이 아니라, '돈'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이다.

교회의 사역자는 분명 '돈'에 대해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그 자유로움이 반드시 가난해야 하는것도, 부해서는 안되는것도 아니다. 때로는 부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가난해 질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그 환경을 보지 않고 주님 주신 환경으로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라 여겨진다.

성경이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면, 먼저는 사역자들도 당당하게 이러한 것을 가르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고, 성도들도 이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은 바들이 있다면 버려야 할 것이다.
 

 

 

1937년 11월, 31세에 디트리히 본회퍼가 이 책을 출간했다.

주된 핵심 내용은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숙적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그는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러 좋은 내용들 중에서 특별히 재물에 관한 글을 옮겨적었다.

 

 

걱정하지 않는 단순한 삶


마6:25~34

 걱정하지 마라! 재물은 사람의 마음에 안전과 태평을 안겨 주는 척하지만, 사실은 걱정을 야기할 뿐이다.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은 재물과 숨 막히게 하는 걱정거리를 함께 얻는다. 걱정 없이 살려고 재물을 쌓는 것인데, 재물이 다시 걱정을 유발하는 것이다. 재물로 목숨을 지키려 하고, 걱정을 통해 걱정 없이 살려고 하지만,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재물에 붙들어 매어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 재물을 고집하는 것, 그것 자체가 걱정이다.
 
 재물을 이용하여 내일을 보장하는 것은 재물을 악용하는 것이다. 걱정은 항상 내일에 초점을 맞추지만, 재물의 용도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을 위한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내일 일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오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고스란히 받는 사람만이 걱정 없이 사는 자다. 일용할 것들을 그날그날 받을 때만 내일 일에 대한 걱정에서 놓여날 수 있다. 내일 일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끝없는 걱정에 내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 곧 내일 굶어 죽을까 봐 오늘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건네시는 무시무시한 조롱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서 반감을 품고 내쳐버리는 율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 아버지, 곧 사랑하는 아들을 선사하신 분을 모시면서 누리는 자유에 관해 알리신 비할 데 없는 복음이다. 어찌 하늘 아버지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롬 8:32)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국내도서
저자 : 엘리자베스 라움(Elizabeth Raum) / 길성남역
출판 : 좋은씨앗 2018.05.14
상세보기



 


 

 

"예배"

이것보다 기쁘고 이것보다 무거운 주제가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예배를 다른교회들과 비교하여 조금 더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이고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많은 예배에 대한 기준점이 있겠지만, 오늘은 이사야서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잠깐 이사야서의 배경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상징하는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시점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남유다도 곧 멸망당하게 되고 포로생활을 할것을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한다.
이사야서 1,2장에서 1장은 북이스라엘의 죄악들, 그리고 2장은 남유다의 죄악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죄악들의 주된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때 이사야서를 먼저 살펴보는것이 우리를 살펴보는데 가장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우리를 살펴보는데 가장 좋은 거울이기때문이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의 번제 헌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으로 배가 부르며 수소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올 때에 누가 너희 손에서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단지 내 뜰을 밟을 뿐이니라.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내 혼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명절들을 미워하나니 그것들이 내게는 괴로움이니라,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내가 지쳤느니라."
 (이사야 1장 11~14절, 한글킹제임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 일어나고 있는 일,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모든일들을 주관하신다.
북이스라엘의 타락된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교훈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먼저 이미 타락하여 망해가고 있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하여 경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까지는 남유다 백성들은 자신들도 망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았고, 결국 예언대로 남유다도 망하게 된다.
중요한건, 망하기 전에 하나님은 계속 경고하시고 남유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계신다.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타락하였는지는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정에 잘 나와있다.
북이스라엘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건, 13절 끝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참으로 두려워진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견지지 못하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불법이라고 한다.
그들의 예배의 형태는 분명 엄숙하였던것 같다. 사람들이 보기에 거룩해보였다. 그러니 하나님도 '엄숙한 모임'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14절에는 그들이 정한 거룩한 절기들 그것이 하나님께는 괴로움이고, 그것을 감당하기에 하나님이 지쳤다라고까지 표현한다.
피곤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여기에서는 지쳤다라고 하시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괴로움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표현인가...

이제는 남유다의 예배를 살펴보자.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그들의 땅에는 또한 은과 금이 가득하여 그들의 보물은 끝이 없고 그들의 땅에는 또한 말이 가득하여 그들의 병거가 끝이 없으며
 그들의 땅에는 또한 우상이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 즉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게 경배하고
 천한 자도 절하며 큰 자도 굴복하니 그러므로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사야 2장 6~9절)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예배도 받지 않으셨다. 그 평가에는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이 많았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우상'에게 경배한다고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섬기는것 같았고, 그들의 중심에도 하나님을 섬기는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들 자신을 섬기고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를 위해 경배하려고 만든 자기의 은 우상들과 자기의 금 우상들을 두더지와 박쥐들에게 던질 것이요,
 또 주께서 일어나사 무섭게 땅을 흔드실 때에 그분의 두려움과 그분의 위엄의 영광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바위틈과 험악한 바위 꼭대기로 들어가리라.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숨은 그의 콧구멍에 있나니 어떤 점에서 그를 수에 넣어야 하겠느냐?"
(이사야 2장 20~22절)

결국, 하나님은 다시금 엄위하게 그들을 심판하시고 주께서 그들의 우상들을 모두 헛된것으로 만들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남유다 백성도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자신들을 위해 만든 모든 우상들을 던져버리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2절에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다.
남유다백성들도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그리고 그들은 '사람'을 의지했었다.
눈에 보이는 쉬운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지만 실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
눈에 보여서 쉽게 의지할 수 있는 우상들과 사람들을 의지했던 것이 남유다 백성들의 죄악이었다.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예배는 '로마 카톨릭'의 타락한 예배일까?
그리고 우리는 종교개혁 이후에 '로마 카톨릭'이 드리는 타락한 예배가 아닌 '개신교'에 속하여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것일까?
아니면 우리들 중 아주 소수는 '개신교'의 타락한 예배에서 벗어나서 소수의 거룩한 무리들로 모여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무리일까?
아니면 우리들 중 일부는 그 소수의 거룩한 무리들도 타락하였다고 생각하고 '나홀로' 예배나 또 다른 '거룩한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무리일까?

우리가 어디에 속했든, 그 공동체가 우리의 예배의 거룩함을 보장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 공동체의 예배 형태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사야서의 1,2장은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예배, 그리고 남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은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배 또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는 없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결국 예수님을 보내셔서 다시금 거룩한 예배를 회복하셨다.

그러나 역사는 흘러 흘러 또 다시 우리는 북이스라엘의 예배의 모습을, 또는 남유다의 예배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여 점검해볼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만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그 답을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자,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는가?

19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정착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한국사회도 일부 자영업자들, 사업가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나 어떠한 조직에 속하여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이다.

회사를 다니는 많은 이들이 창업을 꿈꾼다. 창업을 꿈꾸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이들은 적다.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이유 중 가장 큰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회사생활을 하면 여러가지 어려운 고충들이 많지만 가장 좋은건 달마다 항상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은 매달 동일하게 들어오는 수입에 맞게 생활 패턴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그 수입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 이유는 매달 나가야 하는 대출이자, 카드값 등이 있다.
당장 그달의 수입이 들어오지 않으면 대출이자와 카드값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것이 대부분의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활패턴일 것이다.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피해자일수도 있으며, 그 피해자라는 인식을 하기 전에 이러한 자본주의를 스스로 즐기는 대부분의 대중의 힘일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그 사회 체제속에 살면서 그 자본주의가 말하고자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안타까운 현대인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러한 바쁜 생활가운데 우리는 월급을 받으며 살지만, 그 월급을 주신이가 '하나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 하나님이 주신 월급이라고 믿는이들은 얼마나 될까?

 

내가 그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다.
당장 다음 이직할 직장을 구하지 않은채, 사직서를 낼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보면 된다.
이 말이 너무 급진적인가? 물론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급진적'이기보다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많이 익숙해져서 '성경'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관가 멀어져 있다고 보는것이 더 올바른 견해같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들이다. 입술로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행함으로 삶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실 가장 기초적인 필요인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신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을 실천에 옮겨서 사는 이들은 극히 소수인듯하다.

일부 선교단체들은 Faith Mission을 실천한다. 후원자를 모집하지 않고 죠지뮬러와 같은 기도로 또한 믿음으로 자신의 경제적 필요를 공급받고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단체들의 가치관은 참으로 우리에게 모본이 되는것 같다. 그렇다고 후원자를 모집하고 그 후원자들로부터 생활비와 사역비를 지원받는것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어느것이 더 가치가 있다라고 말할수 없지만, 우리는 Faith Mission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시대인것 같다.

사실 Faith Mission이라고 명칭이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이 Fatih Mission 아닌가 생각해본다. 세상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사역하는 사역자들이나, 세상직업을 가져서 일정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 직업을 주신이와 그 사업을 잘되게 하셔서 월급을 받을 수 있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세상직업을 가진 이들도 Faith Mission이어야 한다. 물로 그 구조상 우리가 믿음을 실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기본 정신은 그렇게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어느 순간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게 된 돈이고, 현대 자본주의가 탄생하였던 배경처럼 나 또한 이윤을 축적하는 자본가가 되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이 아닌 돈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살린다는 생각보다는 통장의 잔고가 우리를 먹여살린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통장의 잔고가 의지의 대상이 되고, 통장의 잔고가 떨어지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기 보다는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에서 자유로울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싶다? 나 또한 이런데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혜택을 맛보며 사는 현대적인 그리스도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폐해속에서 괴로워하는 안타까운 그리스도인들인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우리의 가치관을 다시 정립해야 할까? 
먼저는 자본주의가 확립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정착된 핵심적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역사상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농업의 시작과 함께 제한적으로 존재하여 왔다. 일부 학자들은 중세의 길드를 자본주의적 관계의 맹아로 파악하기도 한다.(일례로 도제를 임금 노동자의 기원으로 파악하는 것) 그러나 중세 사회는 신분제에 의한 제한, 과도한 세금, 지역마다 부과되던 관세, 강제로 부과되는 고율의 이자 등으로 인해 이윤을 창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영국에서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이윤을 축적한 자본가가 등장하였으며 19세기에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정착되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이전 시대에서는 개인이 이윤을 축적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런데 18세기부터 이윤을 축적하는게 제도적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 말의 핵심은 자신의 신분배경과 상관없이 이윤을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든 개인에게 열렸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 이윤을 축적하는데 성공한 개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지배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에 성공한 지배계층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체제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본주의 체제속에서 우리 인간의 욕심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잠재적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돈을 모으는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잠언 23장 4~5절
 4절.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5절.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성경은 '부자'는 '죄인'이다 라고 말한적은 없다. 성경은 항상 부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지만, '부' 자체를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많은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중에 '부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부자 되기에 애쓴 적은 없겠지만, 그들은 부자가 된적이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자를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나쁘게 보는 시선은 버려야 할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건 성경은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것을 얘기한다. 그 '부'는 허무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재물'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갑자기 날아가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살펴보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태복음 6:11)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누가복음 11:3)

분명 오늘날의 상황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 기본 정신은 지금도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루하루 살아갈것과, 그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주님께 기도로써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생활양식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한달 월급을 받고 있으며, 또한 공무원이나 평생직장이 가능한 이들은 하루가 아닌 노인이 될때까지 안정적인 수입원이 있기 때문이다.

 

노후대책까지 다 가능한 사람이 이러한 기도를 과연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에게 양식이 넘치고 매일매일 먹는것에 대해서 모든 필요가 다 채워져 있는데 위의 기도는 도데체 누구에게 적용이 가능한 기도일까? 저 기도는 일정한 봉급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과, 그리고 사역비가 적은 사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기도일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위와 같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사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기도라고 언급을 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그와 같은 특정 대상은 찾을 수 없다.


출애굽기 16장 4절
 (개역개정)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공동번역)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

출애굽기 16장 4절의 공동번역을 보면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 들이게 하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루', '하루'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것에 대한 중요성을 여러번 언급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개척하고 우리 삶을 '돈'으로 보호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기보다는 통장의 잔고와 안정적인 직장을 의지하는게 쉬운 현대인의 삶 아닐까?

성경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한번도 가볍게 여긴적이 없다. 우리에게 먹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한 가정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것도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성경은 게으른 자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으며, 열심히 일할것을 계속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또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열심히 일하더라도 그 '일자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 '일'로 인하여 받게 되는 물질적인 축복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이 주신 축복아래 살면서 그 축복인 '안정적인 직장', '통장의 안정적인 잔고'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주신 하나님을 매일 매일 신뢰하며 살아갈 것을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안정적인 회사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가진 통장의 잔고가 내 힘으로 번 돈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인가?
그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것인가? 아니면 사용할때마다 주님께 결재를 받고 써야하는 것인가?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 안에서 경제적인 쉼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통장의 잔고를 바라보며 경제적인 쉼을 누리고 있는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