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내 마음에 절실하고도 중요하게 다가오는 문제는 선교사 자녀들에 대한 복지이다. 선교목표의 달성이 자녀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알면서 행해 질 수는 없다. 이런 일들은 여전히 너무나 자주 일어나고 있다. 베드로의 자기중심적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마 19:27~30, 복음을 위해 가족을 버렸으니 내가 무엇을 얻겠나이까?) 그가 일찍이 언급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에 대한 강한 훈계와 경고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마18:1~14,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진저!). 그러므로 파송단체들은 선교회 가족의 모든 일원들을 돌보는 일에 우선시해야 한다. MK(선교사 자녀) 케어 제공자들은(예를 들자면, 교육 자문인 교사, 기숙사 사감, 재입국 담당자) 오늘날 선교에서 점차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선교사 멤버케어 세계적 관점과 실천, CLC, 74page Interacton 대표 ' 데이빗폴락' 의 글중 일부 발췌"

하나님께서는 한국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많은 선교의 일꾼들을 택하시고 선교지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축복을 주셨다.
1세기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을것이다.

특별히 한국인들의 열정과 잘 계산하지 않고 뛰어드는 민족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것 같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공동체가 잘 발달되어 있는데, 이러한 민족성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것 같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특성보다는 한국인들이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한것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선택한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물질적으로도 인적자원으로도 한국인들은 선교지에서 많은 사역을 하고 있으며 많은 열매들을 거두고 있다.
그리고 열매를 거두지 않는 지역에서도 많은 씨앗은 뿌려지고 있다.
이러한 일에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와 후원자들 모두 잘했다고 주님이 칭찬하실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일에 서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할것 같다.

그러나, 모든것을 잘할수는 없는법이다.
그동안 잘해왔지만, 앞으로 주님의 사역에 더욱 쓰임받고 하나님의 촛대가 우리나라에서 옮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의 부족한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미래를 준비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특별히 선교1세대들은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우리가 준비해야할 것들은 선교 2세대들의 사역이다.

자국문화권에서 살다가 선교지로 떠나서 외국어를 습득하고,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나가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극복되기 보다는 견뎌내고 계속적으로 자기부인이 필요한 영역이다.
그러나 선교사의 자녀들이 선교사역을 하게된다면 선교1세대와는 확연히 다른영역이 있다.

세가지 정도로 함축할수 있는데,
첫째는 선교에 대한 개념에 대한 이해의 영역이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태어났고, 선교가 무엇인지 부모님을 통해서 배웠으며, 그들의 삶이 곧 선교사의 삶이었다.
이미 자문화권에 익숙한 몸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선교의 삶을 살아내는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선교의 멘토도 필요하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우는것도 필요하고, 주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선교지에서 배우는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선교사 자녀들은 부모님들이 그렇게 배우는 과정들을 제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선교를 이해하는 영역은 그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문화에 대한 이해의 영역이 다른것이다.
선교사 자녀들은 자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정확히 얘기하면 민족 정체성이 부족하거나 없을수 있다.
한국인도 아니고, 선교지 나라사람도 아니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문화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 말은 다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자문화배경에서 자란 선교 1세대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은 특별히 한민족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민족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특이한 나라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타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잘 배우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선교지에서도 그나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문화가 결합된 선교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다.
선교에 있어서 두가지 핵심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언어에 대한 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 두가지를 배우는데 타민족에 비하여 약한게 사실인것 같다.
어쨋건, 선교사 자녀들은 타문화를 배우는데 아주 쉽다.

셋째는 언어습득능력이다.
한국인들은 언어습득능력이 약하다. 이는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선교사 자녀들은 언어습득능력이 좋다.
기본적으로 3-4개 하는것이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세가지 중요한 것들만 짚어보았다.
선교사 자녀들이 반드시 선교를 해야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선교사 자녀들중에 선교를 한다면 그것보다 효과적인 사역은 찾기 힘들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맞게끔 그들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나, 선교 1세대가 선교사 자녀교육에 있어서 실패하여, 그들의 자녀들이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아져서 선교를 헌신하는걸 꺼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것이다. 그것은 하나는 얻었지만 열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선교사들에게 사역에 대하여 지나친 기대와 요구를 한것이 아닌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지나친 요구가 그들의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사역에만 매진하도록 만든 결과가 아닌가 우리는 같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사역과 그들의 가정도 함께 돌볼 수 있도록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이 기대와 요구수준을 성경의 기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유교적 배경과 함께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적인 중요한 가치+ 유교적 가치가 결합되어 지나친 희생, 지나친 헌신이 강요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지나친 희생과 지나친 헌신을 강요한 적이 없다.

오직 사랑에 근거한 기쁨의 헌신, 기쁨의 희생, 기쁨으로 드리는 온전한 제사를 가르치고 있기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에 근거한 헌신은 그들의 자녀들과 부부관계를 더욱 온전케 해준다.
그런데, 한국은 유교적 배경과 섞인 가르침으로 인하여, 부부관계가 깨어지고 자녀들이 더 이상 믿음의 길을 가지 않는 특이한 결과들을 현재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바가 성경에 비추어서 다시 재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선교사들에게 요구하는 기대를 줄이는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인식의 변화가 먼저 일어난다면, 그 이후에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과 케어 진로에 대해서도 한국교회와 선교단체가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에 계신 분들이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는것에 대하여 비용이 많이 든다고 비난하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비난에 앞서서, 선교사 자녀들이 어떻게 초,중고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해보고 실제적으로 어떤지 알아보는것이 성도로써의 마땅한 바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자신의 자녀가 어느 나라의 어떠한 대학도 못들어가고, 미래에 직업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겠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선교사의 자녀들을 책임지신다.
그러나 함께 동역하는 우리들도 그들을 우리들의 자녀로 생각하고 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한국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사용되는 교육비의 10%만이라도 선교사의 자녀들에게 사용된다면, 선교지에 있는 모든 자녀들의 교육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은 너무나 많은 비용이 자녀교육에 들어가고 있는것 같다. 우리는 믿음의 한 형제,자매이므로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다음 티스토리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티스토리에서 제공해주는 2017년 결산내용입니다.

2017년 한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주셨네요

2018년에는 좀 더 부지런히 글을 쓰고 좀 더 전문성을 갖추어야 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특별히

2018년에는 '선교사 멤버케어', '이슬람' 주제로 글을 더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관심있는 분야는 '성경강해' 인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잘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주님 주신 은사로 생각되므로 더 열심을 내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들에 댓글로 의견과 격려해주시면 더 좋은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해 동안 제 블로그에 방문해주셔서 글 읽어 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2018년 한해도 더욱 성경을 연구하고 제 삶에 적용하는데 매진하겠습니다.





http://www.tistory.com/thankyou/2017/tistory/1529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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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블로그 결산  (0) 2018.01.05




그들만의 리그!


'믿음'을 가진 이들.

'하나님'을 믿는 이들.

그래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로 살아가는 이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이와 같이 세상에 부르셨고, 하나님 나라에 가기전까지 이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세상에 두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는듯 하다.


나에게는 아직 어린 세자녀가 있다.

첫째는 아들이고 7살이다. 이제 제법 대화도 되고 자기만의 취미생활(?)도 생기는듯하다.

그리고 둘째인 딸이 있다. 딸은 4살이다. 

셋째도 딸인데, 셋째는 16개월 되었다. 이제 막 걷고, 아직은 존재감이 없지만 젤 손이 많이 가는 자녀다.


우리집 거실은 나름 큰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주로 거실에서 많이 논다.


어느날, 첫째가 거실에서 기찻길을 만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와 셋째가 만드는걸 방해한다.

첫째는 역시나 짜증을 낸다.


그래서 내가 개입하였다.

방해받지 않으려면 너 방에서 문닫고 기찻길 만들라고 하였다.

거실에서 놀려면 둘째 셋째가 방해하는건 감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명이서 사이좋게 같이 놀던지, 원하는 기찻길을 자기스타일대로 만들고 싶으면 자기 방에서 문닫고 조용히 만들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얘기한 이유는, 거실에서 둘째 셋째가 조금 방해하더라도 같이 즐겁게 놀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조금 포기해야 하는것들이 있다.


첫째는, 방에 들어가서 혼자 놀지 않는다.

물론 동생들이 방해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런데, 방에서 혼자 노는건 더 싫은가 보다.


부모의 마음은 첫째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아니..손해가 아니라 자기 스타일대로 기찻길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동생들과 사이좋게 기찻길을 만들고 놀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물론 둘째, 셋째가 기찻길을 엉망으로 만들것이다.

엉망인 기찻길에서 놀 수 없는가?

놀 수 있다.

혼자 노는것 보단 엉망인 기찻길에서 동생들이랑 같이 노는것이 더욱 재미있는 일이다.

그걸 우리 첫째는 아는듯 하다.


항상 나의 제안대로 하지는 않지만, 자기 방에서 혼자 논적은 없는것 같다.

혼자노는것보다는 동생들이랑 같이 노는게 좋은가보다.


우리 집에서 '거실'은 아빠, 엄마가 주로 활동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놀아야지 아빠, 엄마가 같이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는 공간이다.

첫째가 자기방에 들어가서 놀면 자기 뜻대로 기찻길은 만들고 그 기찻길 만든것을 방해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거기는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고, 동생들도 없다.

아직은 우리 첫째는 그러한 것보다는 아빠, 엄마, 동생들이랑 같이 있는게 훨씬 좋은가 보다.


교회도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서로 교제하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사실 많지 않고, 그 범위도 넓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들이다.


하나님에 관한 것들(하나님의 거룩하심,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삼위일체, 전능하심, 전지하심, 하나님의 유일하심(유일신) 등..)

이러한 것들에서 일치한다면,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것들은 대부분 일치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끼리 교제하지 않고 자꾸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직업관, 종말론, 사소한 교리적인 부분들, 성경해석에 있어서의 다양성(차이들), 교단, 문화적인 차이 등)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들(본질적인것들) 이외에 중요하지 않은(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이해하고 서로서로 받아줘야 한다.

서로서로 받으라는것이 다른 생각과 다른 가치관이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여지를 항상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치관들에 대해서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는 어쩔수 없이 그들만의 리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만의 리그란,

우리 첫째 아이가 드넓은 거실에서 아빠, 엄마, 동생들과 놀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마음에 맞는 이들과만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동일한 이들과는 함께 하지만, 그들과 다르면 이단시 하고 적대시하고 같은 그리스도인끼리 이방인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또한 허락하시는것 같다.

허락하는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것은 그렇게 자기들만의 리그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것이다.

그 역사함만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못을 하더라도, 그 가운데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므로 어지러운 세상가운데 어지러운 조직가운데, 어지러운 교회가운데도 구원받는 이들을 더하는 이들이 역사상 그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방안에서 노느것도 재밌다.

그것도 열매가 있으으로 기쁜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들의 세계관대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거실에 나와서 함께 하나님의 세계를 경영해 나가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기들의 생각과 가치관가 맞지 않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또한 자기들끼리 세계를 만들면 잘 만들 수 있지만, 여러 가치관이 다른 이들과 만들려면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실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러분야의 여러곳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다.


혹,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우리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이제는 자기방에서 나와서 거실에서 더욱 더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것이 어떻겠는가?


그리스도인

고립되면, 부패한다.

나와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해야한다.

물론, 본질적인 중요한 것들은 타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은 너그러이 서로를 받아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015년까지 파송된 선교사 수가 3만명이 조금 안된다.

확실히 한국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시는 '선교'의 일에 쓰임을 받았고, 지금도 쓰임받고 있다.


선교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선교지에서 이제는 한국인의 선교사 수가 전체 선교사 수의 50%가까이에 이른다.

선교지에서 한 민족이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 수가 이렇게 많은건 심히 놀라운 사실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쓰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인들의 민족성과 성향도 분명 중요한 영향으로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한국성도들과 선교사들 사이에서 여전히 선교의 선진국이라고 하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한가지가 '선교사 멤버케어'이다.


선교사 멤버케어라고 하면 선교사들은 알겠지만, 일반 한국성도들은 그 용어에 오히려 생소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것이다.

심지어 어떤이들은 선교사가 왜 멤버케어가 필요하냐면서?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 멤버케어는 주님의 명령이고, 우리가 반드시 선교에 있어서 성취해야 할 과제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교사를 부르셔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선교지의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선교사들이다.

그들의 과업의 결과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하였는지에 따라서 열매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한 열매들을 거두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고 선교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하신다.


이 중심에 있는 이가 바로 '선교사'다.

그런데 이 선교사라는 사람은 우리와 동일한 심정을 가졌고,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선교사가 더 위대한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 다만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축복을 주셔서 선교지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신 이들이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필요가 있다.

힘들면 쉬어줘야 하고,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며, 친구들도 필요하고, 여러가지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필요로 하는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이러한 것을 '사역'이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희생'을 알게 모르게 강요했다.

'선교사'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이러한 '희생'을 성도들이 요구하였거나, 사역자 본인들이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의 강권함으로 인한 자발적 헌신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모든 헌신은 한국적인, 유교적인 희생일 수 있다.


성경과는 다른 자기의를 추구하는 희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열매가 아닌 쓴뿌리와 상처와 아픔들로 남겨질 수 있는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결과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선교사 멤버케어가 필요함을 보게 된다.

선교사가 영적,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선교지의 교회와 사역들에 있어서도 건강한 열매를 맛볼 수 있다.


많은 한국선교사들은 '사역'이 거의 100%다.

이는 선교사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의 특징이다.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한국인들은 '일'이 인생의 전부인것 처럼 살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한국인들은 '사역'이라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희생'을 지나치게 강요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것에서 여러가지 불협화음과 잘못된 열매들과 쓴뿌리들이 드러나는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원인을 살펴보고 다시금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필요한것들을 선교단체와 한국교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기일 것이다.


선교사들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내가 만난 선교사들은 년차가 오래되면 될 수록, 감정적으로 아주 민감해져 있는것을 보게 되었다.

살짝만 감성이 터치되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감성이 풍부해진것은 선교지에서 얻을 수 있는 축복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감성이 풍부해진것이 각종 상처와 아픔과 고통들로 인한것이라면 한국의 파송교회와 선교단체가 그 필요를 채워줘야 하지 않을까..

아니 필요까지 채워주진 않더라도 최소한 파송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선교사들에게 상처는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이 아니고서야..

선교지의 경험이 없으면 선교사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선교사 멤버케어의 핵심은 주님의 케어이다.

주님께서 선교사들을 친히 케어하신다.

그런데 그 주님이 선교사들을 케어하실때, 사람들을 사용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교사들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선교사들에게 어려운 짐과, 상처를 주지는 말자.


내가 생각하는 최상의 멤버케어는,

주님께서 선교사들을 케어하는 것이고..

선교사들끼리 서로에 대한 멤버케어를 해주는 것이고..

그리고 파송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선교사들에게 어려운 짐을 주지 않고, 상처를 주는 일들을 최소한으로 삼가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선교사들은 그들 스스로 이미 큰 부담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들에게 짐을 주지 말자.

그 짐들이 어떤것들인지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연재하고자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




시편 105편 3절.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절.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우리 모두는 마음이 즐겁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상황은 완전히 무시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우리는 때로는 천국을 살아가고, 때로는 지옥을 살아간다.

결국, 중요한건 우리의 마음이다.


시편 105편 3,4절에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비결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겁다고 한다.

그렇다. 결국 우리 마음을 만드시고 우리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구할때 우리의 마음은 온전한 만족감을 얻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100% 충족시켜주는건, 우리의 명예도 아니며 인기도 아니며 어떤 인정도 아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도 아니며, 자식도 아니고 아내,남편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또 내 앞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 아내. 잉꼬부부라도 어떠한 재앙이나 병 또는 다른 사건들로 비극적인 슬픔의 이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자주 변하지만, 마음을 다스릴때 어떠한 상황도 극복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비결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그의 이름을 자랑하고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하는자.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을 주신다.


삶이 힘들고 고단한가?

너무 힘들어 살기 힘들며..죽고싶을정도로 괴로운가?

그러한때, 매번 하는 소리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지하게 만나기 위해서 때로는 어려운 환경으로 우리를 몰아가실 수도 있다.

우리의 어려운 환경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을 수도, 우리가 자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건 어떠한 인도하심이든,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아니 사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도 스스로 원한다.


그러므로, 가장 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우리 마음에 즐거움을 회복하자.

마음의 즐거움을 잃은자. 그는 아마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는걸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즐거움으로 넘쳐날 것이다.


나의 마음에 즐거움이 사라진지 오래되었는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이 사라진 이유를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하지 않고 있는데서 발생했는지 기도해보자.


아마도 주님이 음성을 주실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자. 또 구하고 또 구하자. 항상 구하자!!!

사무엘상 2:29~30.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오, 주님 어느순간부터인가 제 안위가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으며, 제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어떠한 위치를 주님보다 더 중히 여겼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과 상처를 받을때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것들이 주님보다 저를 더 귀하게 여겼기때문인것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분명하여 저를 다시금 하나님의 엄하심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다른 머떤것보다도 주님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주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주님보다 다른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생들의 모습을 경멸까지 하시는 말씀을 보게 하시네요..
오..주님 다시금 저에게 주님의 은혜를 베푸사 제가 주님을 제 인생에서 가장 존중히 여기므로 이제는 사람들이 아닌 주님께로 존중히 여김 받음을 가장 귀한것으로 알고 살아가게 인도하소서..
세상은 저를 버려도 우리 주님 저를 버리지 않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저를 쉽게 버리지만, 주님께서는 저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저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고백드립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주님께 제 마음을 다시금 고정합니다.
제가 다른 어떤것보다도 주님께 존중 받기 위해서 몸부름 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성령께서 저를 하나님의 깊은 사귐가운데로 인도하여 줄 것을 믿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우신 주님께로 저를 다시금 이끌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우리의 하나님은 빛이시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빛되신 하나님을 벗어나 어둠가운데 거하고 있는가?
 - 우리가 어둠가운데 있을때 하나님은 함께 거하실 수 없으시다.
 -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때 우리는 빛가운데 있게 된다.
 -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의 빛이 나를 통해서 세상을 비추게 될 것이다.
 - 내가 어둠 가운데 있으면, 그 어둠에 함몰되어 빛으로 나가기조차 거부하게 된다.
 - 성경은 조금의 어둠도 우리가운데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빛, 또는 어둠, 둘중의 하나다.
 -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난 어둠에 거해있는 상태
 - 우리에게는 두 상태밖에 없다. 중간지대는 없다. 어둠과 빛은 공존할 수 없기때문이다.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의 아주 일부분이라도 우리의 삶에 드러난다면 그것은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다. 어둠이 조금이라도 허락되는것, 그런것은 없다.
 - 선의의 거짓말이 가능한것인가? 성경은 그것을 금하고 있다.
 - 어떠한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든,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 우리 삶에 이루어 진다면 그것은 이미 빛에서 벗어난 것이다.
 - 어둠에 거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싸한 말들로 포장을 하더라도 말이다.
 - 그러나 세상과 사탄은 계속 우리를 속인다. 조금의 어둠은 괜찮다라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 그러면서 1%의 어둠을 우리가운데 허락하고, 그 어둠이 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귈수 있다고 계속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 성경은 그러한 것을 철저히 배재한다.

7절.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예수 그리스도는 빛 가운데에 계셨다.
 - 우리도 빛 가운데 거한다. 빛 가운데 거하면 우리의 행함이 의로 넘쳐난다.
 - 그 의로 넘쳐나는 모든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에서 나오게 된다.
 - 그러한 자들은 죄에서 벗어나서 의인의 삶을 살게 된다.
 - 그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서 우리는 찾는다.
 -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된 삶에서 벗어나서 의인의 삶으로 살게 인도한다.

8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우리는 거룩한 신분을 위로부터 얻게 되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의인이다.
 - 그러나 현재적으로 우리는 육신과 새생명이 공존해 있는 상태이다.
 - 우리에게 육신이 있으므로 우리는 새생명으로 살지만 여전히 죄인의 상태이다.
 -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한 자들에게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고 요한일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 역사적으로 온전히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사탄은 계속 우리를 유혹해왔다. 여기에서 넘어진 자들이 많다.
 - 그러나 이땅을 살면서 온전히 의로운 삶을 살수는 없다. 그러한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사하자.
 - 분명히 해둘 것은, 우리의 신분은 온전히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안에 육신이 존재하므로 우리가 성령에 굴복되지 않고 육신에 굴복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인 우리들의 고백이 죄가 있다고 하는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우리의 신분은 온전한 의인이다.
 - '칭의'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거룩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현재적으로 '육신'이 우리안에 여전히 거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 이 죄에 대해서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것이다. 
 - '의인'의 회개는 육신으로 살았던 것을 돌이켜, 다시금 성령으로 살것을 주님 앞에 다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의 신분에 합당하게 '의인'의 삶으로 살아 갈 수 있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 넘어지더라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늘로부터 거듭난 놀라운 신분을 얻게 되었으므로 다시금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넘어질 수 있으나,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신분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우리는 범죄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속에 거한다.
 - 그러므로 다시금 의인의 신분에 합당하게 거룩하게 살 수 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지은 우리 자신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 범죄함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다시금 하나님 아버지의 신분에 맞게 멋지고 거룩하고 빛된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 죄에서 넘어진 자들이 있다면, 그 '죄'를 묵상하지 말고, 우리를 '죄'에서 온전히 거룩케 하신 빛되신 '하나님'을 묵상하자.
 - 모든 영광 하나님께서 받으실 그 날, 우리를 때로는 낙망케하고 넘어지게 하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육신에서 온전히 벗어나게 되는 날이 올것이다.
 -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육신이 아닌 성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이 가능하다.
 - '믿음'이 필요하다.
 - '은혜'가 필요하다. 

 - '하나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 한 번 더 그러면, 키즈까페 안데리고 갈꺼야'
'너 이거 안하면, 지난번 사주기로 한 장난감 안 사줄꺼야'

우리 부모들은 얼마나 많은 순간 자녀들을 협박하고 있는가?

토요일 아침 나는 그러면 안되는줄 알면서도 또 협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후에 7살된 아들과 함께 키즈까페를 가기로 약속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우리 아들도 뭔가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으면 기다리기 힘겨워하는것 같다.
그래서 아들은 당연히 조르고 언제 가냐고 묻게 되는데, 그것이 부모에게는 때로 힘든일이 되기도 한다.
그 어려움이 오늘 아침 나로 하여금 자녀를 협박하게 된것 같다.

'점심먹고 키즈까페 간다고 했는데, 계속 그렇게 못기다리고 짜증내고 하면 안데리고 갈꺼야!'
물론 이 대화는 나의 격양된 감정과 함께 아들에게 얘기한것이다.

그리고 셋째를 데리고 병원에 가면서, 나는 왜 또 아들을 협박할 수 밖에 없는가 고민하게 되었다.
협박하면 안되는줄 알면서..또 협박하는 나를 보면서 후회도 되었다.

아마 아이들이 느끼기에 우리들의 협박이, 그들에게는 우리의 구원을 다시금 취소하겠다는 주님의 음성처럼 들리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잘못한다고 구원을 취소하거나 협박하지 않으시는데,
나는 자녀들에게 이거 못하면 너 구원 뺏어버릴꺼야 라고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협박하는 이유는,
내가 부모로써 하나님께서 두신 위치에서 벗어나서 내 맘대로, 육신대로 자녀들을 다루고 싶어서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할때 내가 해야할 건, 협박하는 나 자신이 이상함을 깨닫고, 다시 돌이켜 올바른 부모로써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게 대하듯이, 그러한 자세로 자녀들을 대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다시금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방법밖에 없는것을 깨닫는다.

육신의 아버지처럼 행할것인가?
생명의 아버지처럼 행할것인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골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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