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일'을 부여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부여하신 임무였다. 그 '일'이 어떤 것인지 하나씩 살펴보자.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으셨는가를 봐야 한다.
 -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과 닮은 모양으로 우리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피조물은 하나님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아주 닮은 형태를 창조하시고 싶으신것 같다. 그래서 가장 비슷한 모양과 형태로 우리를 만드셨다. 그것은 외모의 어떠함에 국한되기 보다는 지,정,의를 가지고 있으며 영혼을 가지고 각종 감정을 느끼며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일을 하며 또한 하나님이 가지신 여러 속성들을 함께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것의 비슷한 모양으로 우리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봐도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진 모든 속성을 우리도 그와 비슷한 형태로 부여받았다. 우리는 신은 아니지만 신과 비슷한 존재로 지음받은 놀라운 피조물인 것이다.

2) 지음받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은 '일'을 부여하셨다. 그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ㄱ)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가축, 온 땅,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는 것
   첫째는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물고기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다스림속에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어떤형태로 가능했을까? 범죄 이전에는 지금의 몸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수영을 하더라도 좀 더 오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물속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물고기보다 수영을 더 잘해야하지 않을까?
  
 둘째는 하늘의 새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하늘의 새를 다스리기 위해서 하늘을 날 필요가 있었을까? 범죄 이전에는 사람도 하늘을 날 수 있었을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하늘로 부활하실때 올라가셨던 것 처럼, 그와 비슷한 몸의 능력을 혹시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뭐, 그렇지 않더라도 새들을 다스리는데는 큰 문제는 없다. 새들을 불러서 사람 근처로 오게 하면 되니깐..
 
 셋째는 가축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염소, 양, 소, 돼지, 닭 등 각종 가축들을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많은 인류가 계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타락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타락이전에는 가축을 다스리는 것뿐이었지만, 지금은 가축들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식량으로 그리고 농사를 돕는 도구로 그리고 성경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제사제물로써 가축들이 드려지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다스림의 존재로써 가축들이 있었다면 타락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가축들을 볼때 하나님의 타락을 기점으로 한 역사에 대해서 경외감을 가질 수 있다.
 
 넷째는 온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원어에도 '땅'은 특별한것은 아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이 지구상의 '땅'을 의미하는 것 같다. 범죄 이전에는 농사를 짓지 않아서 땅이 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다. '땅'을 다스리는 것, 인간이 어떠한 의미로 이것을 해석하고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범죄 이전에는 아무 '지진'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진'을 사람이 다스릴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땅'을 다스리는 건 어떠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일까? 아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그러한 의미에서 기초적인 이 땅을 잘 다스리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지구'를 인간이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또한 아닐까? 나아가서는 이 땅에 '죄'가 드러오지 않도록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신 명령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여기서는 근거있는 해석보다는 여러가지 추측에 불가한 상상속의 해석으로 그치는 것이 안전할 듯 하다.
 
 다섯째는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고 했다. 기는것들에는 지렁이같은 땅속의 벌레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이 있다. 사실 별로 다스리고 싶지 않은, 별로 볼품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다스리라고 인간에게 명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들이 어찌 사소한 것이 있겠는가? 사람의 눈에는 비록 별볼일 없어보이고 다스릴 필요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모든 피조물이 사람의 다스림이 필요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셨던 것이다. 이러한 작은 것까지 다스리도록 명함을 받은 인간의 일은 얼마나 많았던 것인가?

 이와같이 다양하게 주어지고 상당히 많은 양의 일을 과업으로 맡은 인간이 이 일을 어떻게 즐겁고 기쁘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범죄 이전에 슬픔이란 없었을 것인데, 어떤 마음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 일들을 즐겁게 수행할 수 있게 하였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분명한 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은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일할 수 있다는 것 만큼 행복한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다양한 일들을 주었음을 상기해보면서 우리가 맡은 일들의 소중함과 이 일들을 맡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조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 하나님이 두가지 명령을 주셨다.
  첫째는 열매를 맺는 삶이었다. 다른 말로는 결실이 풍성한 삶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 주신 땅에서 충만하게 될 것을 명하셨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열매 없는 삶에 대해서 되돌아봐야 할 필요를 보게 된다. 열매 맺는 삶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태초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 열매 맺는 삶의 결과로 이 땅에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넘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대하셨다.

  둘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물고기, 새, 동물,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것들(식물들 포함)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하시지 않으셨지만 분명한건 하나님이 만든 많은 피조물을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 다스림 안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계획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신 지성들을 사용하고 감성들을 사용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이러한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서 계속 놀라움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들이 넘쳤을 것이다. 결국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배워가길 원하셨을 것이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우리의 삶에 열매 맺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명하신 각자의 위치와 명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주신 은사와 지혜와 각종 능력들로 하나님 주신 일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함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예배로 드려지게 될 것이다.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1)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채소, 모든 열매들을 사람들에게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느끼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 사람에게 큰 노동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음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수고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사람은 분명히 일을 통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먹을것을 먹인다. 그러나 성경을 볼때 일의 목적이 먹고살기 위한 것은 아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일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길 원해서 였던 것 같다. 일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댓가로 우리에게 재물이 주어지고 또한 그 재물로 우리가 먹고 살기도 한다. 그러나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채워주시는 영역으로 보여진다. 물론 그 먹는것의 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 차이 또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아니고 사람의 범죄함으로 인한 결과이지 않은가?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더욱 사랑하시는 사람을 먹이지 않을리 없다. 물론 게으른 자들은 스스로 굶기도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 하나님은 인생에게는 맛있는 채소와 열매들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다른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들에게 풀을 또한 먹이로 주셨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냥 굶어 죽도록, 그리고 스스로 알아서 자기 먹을 것을 먹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먹을 필요가 있도록 지으셨고, 그 먹을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먹을 것을 주신다. 그런데 '일'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직업(일)의 개념과는 조금 상이한 듯 하다. 

 오늘날로 해석하자면, 교회의 일꾼과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도 세상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먹을것', '의식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치관이 있다면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가치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나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재물을 얻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을 통해서 '재물'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장에서의 월급의 가치로 우리의 직업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월급'을 받는 일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과도 그 '일'에 있어서 차별이나 어떠한 상이한 개념을 갖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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